2023. 7. 19. 22:20ㆍ누리에 말걸기/<낭만파 농부>
모내기 하고 보름이 되어간다. 볏모가 논배미에 뿌리를 내린 지 이미 오래고 이제 식구를 늘리는 ‘새끼치기’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실낱같던 벼포기들은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고 몸집을 불리고 있다.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 모내기에 맞춰 비가 흠씬 내려줘야 벼의 생장뿐 아니라 잡초억제에 도움이 되는 법이다. 하지만 올해는 내내 가뭄이 이어지는 바람에 적잖은 어려움이 따랐다. 날씨가 무덥고 가물다 보니 해캄 따위 이롭지 않은 조류와 물달개비 같은 잡초가 번성하고 있다. 물론 왕우렁이를 풀어 넣어 먹어 치우도록 하고 있지만 힘에 부치는 모습이 또렷하다.
그나마 모내기를 마칠 즈음 단비 같은 소식이 전해져 시름을 덜게 되었다. 바로 비봉 돼지농장 재가동을 둘러싼 분쟁의 최종적 타결. 30년 가까이 주민들을 괴롭혀왔고, 지난 8년 동안 악취와 자연파괴의 공포로 내몰았던 문제가 마침내 주민들의 승리로 마무리된 것이다.
이 꼭지를 통해 잊을 만하면 사태의 진행 상황을 ‘중계’해왔던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완주군이 업체의 가축사육업 허가신청에 불허가 처분을 내리고, 이에 불복한 업체가 ‘불허가처분 취소’를 청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하면서 기나긴 다툼이 시작되었다. 주민들은 이지반사(이지바이오 돼지농장 재가동을 반대하는 완주사람들)라는 기구를 꾸려 조직적인 대응에 나섰다. 처음엔 결과를 낙관하는 이가 별로 없었고, 이지반사 구성원들 또한 “질 때 지더라도 찍소리는 내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심정이었다.
한 달 동안 이어진 한여름 군청 천막농성과 두 차례에 걸친 강남 본사 상경투쟁을 비롯해 주민들은 끈질기게 힘을 보탰다. 다행히 소송을 대리한 홍정훈 변호사의 뚝심과 치밀한 대응으로 1심과 2심에서 잇따라 승소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지반사는 처음부터 법정 다툼이라는 소모적이고 적대적인 방식이 아니라 업체와 지역주민이 상생하는 길을 가자고 호소해왔다. 다시 말해 완주군이 농장부지를 적정한 가격에 매입해 환경친화적으로 활용하고, 업체도 손실을 보지 않는 방안을 제시했던 것. 처음엔 콧방귀도 뀌지 않던 업체 쪽은 잇따라 소송에서 패소하자 태도를 바꿔 농장부지 매매협의에 응했다.
이 과정에서 나로서는 행정당국(관)과 한 배를 타고 호흡을 맞추는 아주 낯선 경험을 하기도 했다. 물론 그 과정이 결코 녹록하지는 않아 완주군과 군의회를 상대로 한 설득에 애를 먹기도 했다. 적잖은 어려움 속에서도 군과 의회가 ‘주민의 환경권 보장’이라는 대의를 좇아 농장부지를 매입하기로 용단을 내려줬다.
마침내 올해 모내기가 끝날 즈음 완주군과 업체는 매매계약을 체결했고, 업체는 사전협약에 따라 행정소송의 상고를 취하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농장부지는 완주군 소유가 되어 양돈장 재가동 여지는 사라졌고, 이를 위한 사법, 행적절차도 모두 끝이 났다. 2심 판결은 주민의 환경권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었고, 앞으로 비슷한 사건이 벌어질 경우 중요한 판례로 남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지난 세월이 그저 꿈만 같다. 다들 어렵다 하고 스스로도 결과를 낙관하지 못한 싸움에서 우리는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기적을 이루어낸 셈이 됐다. 2심 판결은 “인근 주민들의 불편도 공익상 고려요소 중 하나에 해당함은 부인할 수 없다”고 하여 주민의 환경권에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그 의미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고 믿고 싶다. 비단 ‘주민’이라 불리는 인간의 권리 뿐만아니라 ‘자연-생태’라는 좀 더 근원적인 가치에 비춰 큰 걸음을 내디딘 것이라고 말이다.
올여름 무더위가 심상치 않다고, 최고기온 기록을 갈아치울 것이라는 전망에 벌써 숨이 막혀온다. 기후위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엄청난 온실(메탄)가스를 내뿜을 뻔했던 공장식축산의 거대기지 하나를 없앴다는 것은 자못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나아가 이번 판례가 비슷한 유형의 온실가스 생산기지를 예방하는 효과까지 거두게 될 터이니 하는 말이다.
정녕 큰 잔치를 벌여도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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