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27. 18:15ㆍ누리에 말걸기/<낭만파 농부>
이젠 꼼짝없이 농사철이다. 이번 주말에 볍씨를 담그니 말이다.
손가락을 꼽아보니 벼농사가 올해로 열두 번째다. “농사라는 게 몇십 년을 해도 해마다 1학년”이라는 옆 마을 늙은 농부의 얘기가 떠오른다. 뭐 실제 그렇지는 않겠지만 농사를 처음 시작하는 마음은 늘 부담스럽다. 10년 가까울 때까지도 농사철이 다가오면 지나간 해의 기록들을 일일이 뒤적이면서 준비할 농자재와 필요한 작업을 몇 번씩 확인했더랬다. 그래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불안감이 떼쳐지질 않는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초반 모농사의 경우 일을 크게 그르치는 사고를 몇 차례 겪다 보니 더더욱 신경이 곤두선다. 품종이 다른 볍씨가 뒤섞이는 바람에 다시 담그기도 했고, 싹이 올라오지 않아 못자리 작업을 다시 한 경우가 두 번이다. 지난해는 처음 보급받은 신품종의 특성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탓으로 발아에 실패했다. 그 바람에 다시 볍씨를 담가 모판에 넣고 못자리를 다시 앉혀야 했다. 무려 2천 판이 넘는 양이었다. 그러니 바싹 긴장이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다.
하기야 미리부터 마음을 졸인다고 사고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할 순간은 그때그때 작업공정이다. 지금은 홀가분하게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할 때인지도 모른다.
거기에 생각이 미쳐서일까, 지난 주말에는 경북 문경에 나들이를 다녀왔다. 벼농사두레 회원들로 구성된 등산모임 ‘사니조아’에 끼어서. 나야 등산모임 정식 성원은 아니지만 이번 산행 프로그램에 강하게 끌리던 터다. 무엇보다 우리 벼농사두레와 많이 닮은 ‘희양산 마을’이라는 공동체와 만난다는 것이었다.
‘희양산 마을’은 문경시 가은읍의 원북리와 상괴리에 사는 사람들로 짜여 있다. 이십여 년 전부터 토박이 주민들과 귀농인들이 함께 어울려 유기농 쌀을 지어 <희양산 우렁쌀>이라는 상품명으로 판매하고 있다. 그 쌀을 원료로 <희양산 막걸리>를 빚는 양조장도 있다. 나로서는 거기에 뿌리를 내린 이런저런 인연들을 만난다는 기대도 컸다.
선배가 운영하는 ‘가은 수련원’에 여장을 풀자마자 술판이 벌어졌다. <희양산 막걸리>를 주거니 잦거니 밤이 이슥토록 서로에 대한 궁금증을 푸는 대화가 이어졌다. 뜻밖에도 30년 만에 고등학교 같은 반 친구를 만난 이들이 있어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르기도 했다.
이튿날 아침, 숙취로 거북한 속을 부여안고 희양산에 올랐다. 해발 999미터 그리 녹록지 않은 산이지만 여섯 시간 남짓 쉬엄쉬엄 느긋한 산행. 하산길에는 작목반 식당에서 라면으로 출출한 속을 달랬다. 작목반에서 직영해 매주 화요일 방아를 찧는다는 작은 도정시설이 어찌나 부럽던지.
어느덧 돌아갈 길을 재촉해야 할 시간. 조만간 고산에서 다시 만나자는 다짐을 주고받으며 귀로에 올랐다.
이것으로 농사를 위한 몸과 마음의 준비는 끝난 것일까. 그보다는 농한기를 떠나 보내는 아쉬움이 아직은 커 보인다. 주말 나들이로도 모자랐던지 이런저런 핑계로 술추렴이 이어지고 있으니 하는 얘기다.
지금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부터는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사나흘 뒤 볍씨를 담그는 것을 시작으로 노동절(5월1일)-어린이날(5월5일)로 이어지는 ‘황금연휴’를 볍씨 넣기와 못자리 작업에 바쳐야 하니 말이다. 이 만만찮은 공정을 해치우자면 적잖은 일손을 모아야 하고 작업준비도 세세히 챙겨야 한다.
연두빛 신록은 조금씩 그 푸르름을 더하고 있다. 뒷산에서는 소쩍새 우는 소리도 부쩍 잦아졌고, 들녘에서는 머잖아 개구리들의 합창도 들려오겠지. 5월이 숨차게 밀려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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