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5. 13. 18:01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풀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나무꽃이 봄 들녘 허리를 눈부시게 수놓았다면 지금은 풀꽃이다. 초여름으로 접어들었다는 얘기. 잔디밭 가장자리, 마당 언저리에 나지막이 피어나는 수레국화, 데이지, 꽃양귀비, 금계국... 길섶에는 이제 간드러진 풍경이 펼쳐지겠지.
농사철로 들어섰건만 농사꾼은 꽃 타령에 넋이 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가을부터 꽃씨 뿌리고, 모종 옮겨심으며 싹이 텄나, 뿌리를 내렸나 애를 태워왔더랬다. 겨울을 나고 날이 풀려 쑥쑥 올라온 꽃자루마다 망우리가 맺혔다. 얼마나 기특하던지.
그런데 그리 애지중지하던 꽃줄기가 짓눌리고 말았다. 볍씨를 담그던 날, 염수선(소금물로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일) 작업에 열중하던 이들이 무심결에 꽃 무더기를 밟고 지나간 것. 그것도 몇 차례나. 그때마다 내 몸뚱이가 짓밟히는 듯 가슴이 움찔움찔하는 거다. 이러다간 죄다 결딴나겠다 싶어 잠시 작업을 멈추고 주의신호를 보내야 했다.
이거 좀 예민한 거 아니냐고? 실제로 의아스러운 표정을 짓는 이가 더러 있었다. 벼농사 짓는 농부라면 ‘꽃보다 볍씨’ 아니냐고. 물론 그렇게 여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 순간 볍씨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래, 볍씨보다 꽃이 더 중하다면 농사꾼인가, 한량이거나 원예가인가. 나는 정녕 무엇인가.
안 그래도 스스로 의아스럽던 참이다. 일단 벼농사만 짓는 농부다. 벼농사 작기는 반년(5월~10월)이니 가을부터 봄까지 나머지 반년은 농한기인 셈이다. 농사철이라 해도 모내기와 가을걷이 같은 농번기를 빼고는 한갓진 편이다. 결국 “농사보다 OO”이 나를 규정짓는 셈이다. 이른바 ‘반농반X’를 넘어서는 그 무엇.
얼마 전 한 술자리에서 “따지고 보면 출가를 한 셈이고, 그렇다면 ‘사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다들 손뼉을 치며 그렇다고 하는 것이다. 왜 아니 그렇겠나. 추워지면 ‘동안거’에 들어 문을 닫아걸고, 한여름 폭염에는 논배미야 어찌 됐든 ‘하안거’인 듯 납작 엎드려 있으니 말이다. 그 안에서 무얼 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어쨌든 추위와 더위 속에 수행이라면 수행이겠다.
이렇게 보면 농사꾼인지, 한량인지, 사문인지, 또 다른 무엇인지 아니면 그 모두인지 스스로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 순간 분명한 것은 농사철이 되어 나는 다시 벼농사를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 점에서 나는 농사꾼인 게 틀림없다.
이미 꽃줄기가 짓밟히는 아픔 속에 볍씨를 담그고 촉을 틔워 모판에 파종하고 싹을 올려 못자리에 앉혔다.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4월말부터 5월초에 걸쳐 고산권벼농사두레 두레작업으로 해치웠다. 지금은 볏모가 못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상태다.
그런데 올해는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그러께부터 벼두레 경작면적이 크게 늘어나는 바람에 두레작업에 과부하가 걸렸더랬다. 고심 끝에 벼두레 공동경작지에서 우리 논배미 대부분을 제외한 것이다. 그에 따라 벼두레 차원의 전체 경작면적은 절반 가까이 줄었다. 당연히 두레작업에 드는 노동력과 여러 부담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하여 올해 두레작업은 더 느긋하면서도 여느 해보다 훨씬 빨리 끝났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들먹일 것도 없이 세상일이란 본시 덧없는 법이다. 그러니 찰나 뒤의 일을 어찌 알겠는가. 월간 <완두콩> 2025년 5월호 칼럼
'누리에 말걸기 > <농촌별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땅 파먹고 사는 자의 4월 (0) | 2025.04.17 |
---|---|
오는 봄이 슬픈 까닭은 (0) | 2025.03.12 |
'저절로 그런' 날들 (1) | 2025.02.10 |
길 끝에 또 길이 있다 (0) | 2025.01.15 |
대통령제, 그만 둘 때도 되었다 (2) | 2024.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