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5. 13. 01:01ㆍ발길 머무는 땅/중앙박물관 재구성
아는만큼 보이나, 아는 게 병인가
중앙박물관의 재구성 ①
세 개 층을 각각 반으로 나눈 여섯 개 구역의 전시실을 모두 돌아보는 데는 대략 15시간이 걸린 듯 하다. 그 시간을 내내 걷다가 서서 보았으니 다리에 무리가 갈 수밖에. 허나 그 모두를 돌아본 뒤 찾아온 통증은 다리가 아니라 눈과 머리였다. 눈은 튀어나올 듯 했고, 머리는 빠개질 듯 했다.
둘러본 유물, 작품은 도대체 몇 점이나 되는 것일까. 모르긴 해도 1만점은 족히 넘을 듯하다. 물론 한 점 당 관람시간 5초 해서 5만초, 대략 14시간... 이런 식의 계산을 하는 건 그야말로 아둔한 짓이다. 하나하나를 뚫어져라 볼 필요도 없거니와 '휠이 꽂히는' 것이라면 몇 십분인들 아까울까. 하여 1만여점에 이르는 유물·작품을 가만히 떠올려봤다. 게 중 몇 가지가 떠오른다. 주로 초중고교 교과서며, 이런저런 책, TV 다큐를 통해 이미 '사전학습'으로 익숙해진 것들이다. 물론 그렇게 익숙한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즐거움도 여간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런데 10시간 넘는 시간 내내 늘 따라붙었던 것은 다름 아닌 곤혹스러움이었다. 팔자에 없는 호사를 누리고도 그게 무슨 망발이냐고 타박하지는 마시라. 그것이 다 문외한들이 겪어야 하는 서러움이거늘.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의 문화제 관리체계는 무척 권위적이다. 요즘 한창인 '국보1호 논란'을 통해 드러난 것처럼 유물이면 유물이지 거기에 국보네, 보물이네 서열이 매겨지고, 국가지정문화제니 지방문화제니 따위의 꼬리표도 달려 있다. 물론 전문가들의 눈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다같이 옛사람의 손때가 묻어 있고, 오랜 세월과 풍상을 겪고 살아남긴 마찬가진데 품격이 낮게 평가된 유물들은 얼마나 아니꼬울까. 실제로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금동불인데 어떤 놈은 국보요, 어떤 놈은 아무런 칭호도 받지 못한 게 수두룩하니 그걸 제대로 보지 못하는 나 같은 문외한은 꼼짝없이 주눅들 판이다. 유물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한 두 가지가 아닐성 싶다. 조형미, 역사적 가치, 희소성 따위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거겠지. 나 같은 사람이야 어차피 문화재위원도 아니고 보면 뭐 크게 괘념치 않아도 될 듯은 하다. 그저 '에게~ 저게 무슨 국보야?' 하고 내식대로 판단하면 그만일테니.
실제로 유물을 훑다보면 그런 의문에 휩싸이는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또한 우리 패거리만의 것도 아니다. 신라의 장신구를 모아놓은 전시관에서다. 순금제 목걸이들이 여러 점 진열돼 있었는데 막대를 연결해 만든 것과 나뭇잎 다발을 엮은 모양의 것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내 눈에도 나뭇잎 모양이 훨씬 화려해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행 중 한 명이 말한다. "어? 저건(막대형) 국본데, 이건(나뭇잎형) 아무것도 아니네?" 그러고 보니 막대형 목걸이에는 '국보'라는 금색 문양이 떠억 붙어 있지 않은가. 이럴 땐 그저 "그러게?"하고 맞장구를 쳐주면 그만이었을 텐데 입이 방정이라고 그예 "저것이 더 세련돼 보이지 않아?"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오고 말았다. 책임질 수도 없는 주제에... 금새 후회를 하고 말았다.
관람자 모두가 너도나도 문외한이니 한 두 번 그런 식의 댓거리가 오가다 보면 나중엔 그런 소박한 품평마저 주저하게 되고 만다. 묻는 사람도, 대답하는 사람도 다 실없긴 마찬가지인 탓이다. 기념품 가게였다면 어땠을까. "에이~ 이건 좀 둔하게 생겼어. 어, 그래! 저게 제대로 빠졌네." "아니, 내가 보기엔 그보다는 요게 더 날렵한데. 이건 어때?" 뭐 이런 식의 즐거운 대화가 오갔을 것 아닌가.
유물에 어줍잖게 서열을 매겨 놓으니 즐거움보다는 곤혹스러움과 마주할 때가 너 많기에 하는 소리다. 그래 보호할 가치가 높은 유물이라면 다른 나라들처럼 그저 '중요문화제' 정도로 해두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굳이 서열을 매겨야 직성이 풀린다면 국보나 보물로 지정한 이유라도 친절히 밝혀놓으면 좀 좋은가.
지금은 문화재청장을 하고 있는 유 아무개 교수가 스테디셀러가 된 그의 책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말이지 박물관을 제대로 둘러보려면 그 말이 맞을 성 싶다. 그런데 말이다. 10시간 남짓 박물관 둘러보자고 몇 년이 걸릴지 모를 만여점 유물의 내력이며, 조형적 특성 따위를 일일이 공부해야 하는가. 박물관이 그걸 알려주는 구실을 하면 안될까?
거꾸로 '아는 게 병이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솔직히 교과서나 이런저런 도록에서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유물의 실물을 보고는 실망한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도자기를 전시해 놓은 3층 미술관, 특히 청자관에서 그랬다. 뭔 놈의 국보가 그리도 많은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기기묘묘한 모양의 자기들의 행렬에 넋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분명 'TV쇼, 진품명품'에 나오는 자기보다야 훨씬 가치가 있는 것들일텐데 워낙 수작들만 모아놓아서 그런지 눈의 수준만 한껏 인플레된 느낌이다. 그런 와중에 '목불인견의 참상'을 보고야 말았으니 이를 안타깝다고 해야할지...
다름 아닌 청자칠보투각향로 얘기다. '세 마리 토끼가 떠받치고 있는 능화반(稜花盤) 위에 앙련화판(仰蓮花瓣)으로 겹겹이 싸여 있고, 그 위에 둥근 윤대 위에 칠보문(七寶紋)을 투각(透刻)한 구형(球形)을 얹은 화사(火舍)가 놓여 있는' 국보 95호 말이다. 토끼는 정말이지 앙증맞기가 이를 데 없었지만 '앙련화판'은 귀퉁이가 깨져나간 잎이 서넛 보였다. 그것까지는 그렇더라도 오른쪽에서 바라보니 '능화반' 가운데쪽이 조금 벌어져 있는 게 아닌가. 처음엔 잘못봤나 싶었는데 왼쪽으로 돌아가보니 깨어진 건지, 벌어진 건지 그 틈이 족히 7~8미리는 돼 보였다.(사진첩) 그러고 보니 수준급의 유물은 보통 사방에서 볼 수 있도록 전시해놨는데 이 향로는 벽면에 전시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고... 보관상태가 안좋거나 애초부터 불량품일 수도 있는 건데 그런 흠이 있다는 소릴 들어보지 못해서 기분이 썩 좋은 건 아니었다.
'공예적인 섬세한 장식이 많은 듯 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이 잘 잡힌 안정감 있는 뛰어난 청자 향로'(문화재청)로 이름이 높다. 그러나 몸체를 받치고 있는 대좌가 갈라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왜 그리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에고~ 더 길어지면 도망가겠다. 아무튼 그 많은 유물 하나하나에서 감동을 먹고, 역사의 향기를 맡을 순 없는 노릇이다. 그저 휘휘 둘러보다가 유난히 눈길이 가는 유물이나 작품의 기를 받아오는 것만도 관람은 제몫을 다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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