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박물관의 재구성 ⑤ 슬픈 백제 <2>

2007. 5. 25. 03:16발길 머무는 땅/중앙박물관 재구성

백제가 슬픈 이유

 

백제는 슬프다. 세 나라가 한반도 패권을 놓고 겨룬 각축전에서 패했고, 그 연장전이라 할 후삼국 쟁패에서도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 패배의 역사가 원죄로 남아 고려시대엔 '훈요십조'를 통해 비토 당했고, 조선조에서도 사정은 엇비슷했다. 그 오랜 좌절의 한이 갑오년 농민봉기로 분출했건만 이마저 끝내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현대에 들어서도 광주민중의 봉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 1천5백년 좌절의 시발점에 백제가 놓여 있는 것이다.

 

승리한 신라에 모든 영광을?

 

이런 역사인식을 두고 혹여 '지역색'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물론 그런 뜻으로 꺼낸 얘기는 아니다. 엄밀히 말해 천오백년 전 그 땅에 살았던 사람과 지금 그 땅에서 사는 사람이 한 핏줄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백제의 주류세력만 하더라도 만주에서 발원한 부여국의 한 지류가 아니던가. 오늘 한국의 인종적 구성은 북방계와 남방계가 대략 7:3의 비율로 섞여 있다는 게 정설이다. 내 부계혈통만 하더라도 본관은 황해도 연안이고, 직계조상이 호남벌에  자리 잡은 건 대략 임진왜란 이후라는 점만 봐도 이는 분명해진다. 그런데도 나는 왜 그리 백제에 연민을 느끼는가.

 

나 또한 어린 시절엔 신라의 '삼국통일'에 뿌듯해 했고, 그 견인차였던 김유신을 우러렀다. 한 사람, 특히 어린 아이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제도교육이 고도의 정치행위라는 걸 안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 <삼국사기>가 신라 중심의 기록이라는 것, 그 배경에는 편찬을 주도한 김부식이 신라계 귀족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 '열전'에서 차지하는 김유신 조의 분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한다. 더욱이 전체주의 유신체제가 꼴같잖은 '한국적 민주주의'를 들먹이며 ‘화랑정신’을 추켜세우던 시절이니 오죽했을까.

 

그 뒤 조금은 철이 들고, '정사는 승자의 기록'임을 알게 되면서 나는 어린시절의 그 역사인식을 버렸다. 그 사이 세상도 많이 변했다. 이른바 '신라 중심의 삼국사관'도 커다란 반발을 낳았다. '외세를 등에 업은 삼한통일'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폭넓게 자리를 잡고 있다. 이 또한 다른 종류의 '정치적 고려'가 담겨 있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통일전쟁 과정에서조차 당나라 '꼬붕' 노릇을 했던 신라의 태도가 고울 리는 없다.

 

멸망의 아이콘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경우

 

그 점에선 역사적 사실에 비춰 지나치게 희화화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몇 해 전 개봉됐던 영화 <황산벌>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본다.(그런데 극중 의자왕과 계백으로 분한 오지명과 박중훈이 전라도 사투리를 쓴 것은 고증에서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당시 사비는 오늘의 충청남도 부여 땅이다.)

 

백제가 슬픈 이유는 또 하나 있다. 삼국사기는 의자왕을 내세워 당대 백제의 '말기증상'을 강조했지만 오늘의 연구결과는 그와 판이하게 다르다. 김부식의 역사기술이 '정략적'이라는 것이다. 이 역사왜곡은 반드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단군 이래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 받는 세종도 "백제는 삼천궁녀로, 신라는 포석정으로 망했다"고 평했다니 하는 얘기다. 한 사회는 생성->성장->쇠퇴->소멸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게 바로 문화다. 비근한 예로 흔히 로마를 든다. 쇠퇴기 로마사회를 좀먹은 퇴폐적 문화 말이다. 그렇다면 멸망할 즈음의 백제문화도 그랬던가.

 

          백제를 슬프게 만든 원인의 하나로 꼽히는 삼국사기. 

 

최근의 연구결과는 유감스럽게도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완숙기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설이 폭넓게 지지를 얻고 있다. 백제는 물론 600여년의 역사 거치면서 부침을 겪는다. 초기 지금의 풍납토성을 중심으로 한 한성시대에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추다가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밀려 왕이 잡혀 죽는 치욕 끝에 웅진(공주)으로 내몰린다.

 

웅진은 산맥으로 둘러싸인 좁은 땅이다. 난세에 방어하긴 유리하나 진취적으로 뻗어나가기엔 옹색한 곳이다. 백제는 그 곳에서 두 세대(약 60년)의 수세기를 보낸 뒤 성왕 대에 이르러 사비(부여)로 천도를 하게 된다. 사비시대는 백제로서는 부흥기에 해당한다. 왕조를 중심으로 보자면 성왕-위덕왕-무왕-의자왕으로 이어지면서 '완숙미'로 상징되는 백제문화를 구가하는 것이다.

 

백제 ‘완숙미’의 수수깨끼

 

바로 그 점이다. 이렇듯 전성기를 누리던 백제가 어느 순간 '졸지에' 망해 버린 것이다. 그 배경으로는 '초창기 잘 하는가 싶던 의자왕이 언제부턴가 왕비한테 휘둘리면서 정신을 놓았다'는 것이 역사적 정설로 통한다. 그러나 그게 어디 왕조만의 문제던가. 백성들은 꿔다놓은 보릿자루고? 하여 어떤 이는 '국제적 대응에 소홀했던 실책' 등을 거론하기도 하지만 백제 멸망의 원인은 여전히 수수깨끼로 남아 있다. 백제가 망한 뒤에도 왜와 손잡은 부여풍을 중심으로 3년씩이나 '부흥운동'을 펼쳤고, 4백여년 뒤까지 견훤을 중심으로 '백제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나섰다는 사실이 '멸망의 지당함'을 부정하는 근거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완숙미'를 칭송 받는 백제의 유물은 현재 그닥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망국의 처지로 더러는 파괴됐을 것이고, 온갖 수단을 당했을 법하다. 이는 조선이 일본에 강점당한 뒤 우리문화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를 돌이켜 생각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할 것이다. 그 와중에 용케 살아남은 백제의 흔적. 그래서 더 그것에 연민이 가는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