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박물관의 재구성 ④ 슬픈 백제 <1>

2007. 5. 25. 01:54발길 머무는 땅/중앙박물관 재구성

백제로 가는 시간여행

 

고고관 입구에서 만난 네 가지 유물 얘길 하다가 백제 산수문전에서 멈칫 했었다. 백제에 대해 할 말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뿌리의식'을 지니고 있다. 스스로 의식하지는 못하더라도 잠재의식에 깔려 있는 원초적인 소속감 말이다. 우리는 이따금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다. 나? 나는 사회진보를 갈망하며 노동자의 대의를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의 한 사람이지. 하지만 어디 그것뿐인가. 난 누구의 아비요, 누구의 남편이고, 누구의 자식이고, 누구의 손자고. 누구의 친구고, 누구의 동지이고... 우리는 결국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서 왔는가.

 

호남들녘 ‘지푼내’의 전설

 

그래. 우리는 역사적 존재이기도 하다. 난 어찌어찌 하여 노동현장에서 일했고, 그전엔 공부를 해왔고, 또 그 전엔 호남들녘의 한 구석에서 자랐고, 야트막한 산과 무논만 보이는 곳에서 태어났고, 우리 부모도 그 곳에서 대대로 살아왔고, 우리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그 곳에서 자라 뼈를 묻었고, 아직도 그곳엔 그들의 무덤이 있고... 그렇게 꼬리를 물고 가다보면 닿는 곳은 어디지?

 

                    한 포털사이트에 '망성면 전경'이라는 제목을 실린 사진.

 

그러고 보니 그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을 성싶은 고향의 전설이 있다. 반경 10리를 아우르는 그 전설. 그 속에는 함박골, 쌀이티, 화정(火鼎), 깊은내, 다리목, 진터라는 토속적인 마을 이름이 등장한다. 그 이름에서 당신은 어떤 전설을 상상할 수 있는가. 아무래도 어렵겠지.

 

'옛날에' 그 땅에서 큰 전쟁이 벌어졌다. 얼마나 많은 군사가 동원됐던지 밥 짓는 일도 만만치가 않았던 모양이다. 한 마을의 함박(함지박)을 모두어 쌀을 실어날아 그 옆 동네에서 쌀을 일었고, 또 그 옆 동네의 솥을 모아 밥을 지어 먹였다. 그리고 거기서 10리쯤 떨어진 벌판에서 대혈투가 벌어졌는데 그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죽은 군사들의 피가 흘러내렸는데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그 피가 깊은 내를 이루었다. 여기서 각 마을 이름의 유래를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백제에 가 닿다

 

그곳이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전북 익산시 망성면 심천리(深川里)다. 심천이란 '깊은내'라는 고유지명을 일제 때 개칭한 것이고, 그나마 지금은 족보도 없는 내촌리(內村里)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런데 이 전설의 시대적 배경이 언제인지는 아직 나도 모르겠다. 당시 패전한 장수가 자신의 갑옷을 산 속 연못에 벗어 던지며 "내가 몇 백(천)년 뒤에 돌아와 찾아가겠다"고 했다던데, 그 장수가 살아오면 알 수 있을지 모를까. 나는 그것이 아마도 삼국시대 일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 때라면 그 곳은 당연히 백제의 영역이다.

 

나는 그 곳에서 나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가 자란 동네는 깊은내다. 그곳은 구개음화 현상이 매우 진전돼 있어 계집을 '지집'으로, 쌀겨는 '쌀저'로, 심지어 라디오도 '나지오'로 발음한다. 따라서 깊은내는 당연히 '지푼내'가 되겠다. 어느 비 내리는 겨울날 나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우산을 받쳐 쓴 채 학교로 갔다. 다른 동무들은 다들 학교엘 간다는데 왜 나는 안 보내느냐고 떼를 썼던 기억. 출생신고가 1년 넘게 늦은 탓에 취학통지서가 나오지 않았고, 아버지는 그걸 해명하러 나를 데리고 학교에 갔던 것이다. 교감(?) 선생 앞에서 대략 1, 2, 3, 4... 가갸거겨... 이딴 거 묻고 답하면서 수학능력을 테스트 당한 기억이 어슴프레하다.

 

초등학교는 동네에서 1킬로 남짓 떨어진 곳이고, 비포장 신작로로 곧장 연결됐다. 늦봄부터 코스모스가 길섶에 솟아나기 시작해 초가을엔 발그래 꽃을 피우고, 우리는 그 사이를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따위의 노래를 부르며 등하교를 했었다. 겨울엔 몰아치는 맞바람 피해보겠다고 서로 뒷줄에 서려 아귀다툼을 벌이기도 했지.

 

성남초등학교. 물론 예전엔 널판지로 감싼 흙벽에 기와를 얹은 건물이었다

 

‘계백장군 정기 서린 곳’...

 

백제 얘길 하려던 것이 그만 옆길로 새고 말았다. 아무튼 그 국민학교 교가가 이렇다. "백제의 옛터전이 익산의 망성. 호남의 넓은 들에 터를 닦았고. 미륵산 뻗친 정기 감도는 이곳. 솟아나는 맑은 샘물 주야 흐르니. 우리 학교 어린이의 배움의 전당."

 

조무래기들이 줄지어 집으로 돌아갈 때쯤. 가끔가다 인근에 자리한 '육군 제2하산관학교' 훈련생들이 행군 또는 구보를 하면서 자기들 '교가'를 부른다.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첫 소절이 '황산벌 계백장군 정기 서린 곳. 빛나는 제2하산관하교...' 대략 이랬다.

  

어쨌든 이것으로 나의 원형질이 백제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니 백제에 대해 관심이 많을 수밖에. 그러나 우리가 배운 백제는 의자왕, 삼천궁녀, 낙화암... 오욕과 무능으로 점철된 역사 아니던가. 물론 처자식을 단칼에 도륙낸 뒤 5천 결사대를 이끌고, 결사항전했다는 계백장군의 전설도 있지만, 그 역시 패자의 기록이긴 마찬가지다. 아, 가엾은 백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