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박물관의 재구성 ⑦ 아! 백제금동대향로

2007. 5. 27. 16:08발길 머무는 땅/중앙박물관 재구성

한반도 조형유물의 절정

 

 

백제를 대표하는 유물 하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금제관장식이 꼽혔다. 1971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이 유물은 전체적으로는 불꽃 형상이며, 인동당초무늬를 새겼다. 그 쓰임새는 영화 <황산벌>에서 의자왕, SBS 드라마 <서동요>에서 백제왕이 썼던 관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꼭 그런 모양이었는지는 타임머신 타고 가봐야 알 수 있겠지만. 그런데 이 관장식은 ‘대표’ 자리를 다른 유물한테 물려주었으니 그것이 바로 1993년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다.

 

금제관장식

 

드라마 <서동요>에 재현된 금제관장식

 

한반도 고대유물의 백미

 

내가 보기에 중앙박물관 고고관에서 만난 유물 중 백미는 단연 이 백제향로였다. 물론 한시적으로 전시한다고 했으니 지금쯤은 그곳에 가도 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향로의 원소장지는 당연히(?) 부여박물관이다. 부여군 능산리 고분군 근처에 있는 절터에서 출토됐고, 백제의 유물임이 확인됐기 때문이겠지.

 

금동대향로는 백제문화의 결정판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뿐더러 우리 유물 전체를 통틀어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조형미가 아름답다는 평을 듣고 있다. 부여군의 상징물도 당연히 이 대향로고, 심볼마크의 기본테마로 쓰였다. 마치 익산시 심볼마크 기본테마가 미륵사지 석탑이듯이.

 

                         부여군 상징마크와 마스코트의 기본테마는 바로 백제대향로다.

 

이 향로가 출토되기 전에는 이런 모양의 향로를 보기 어려웠다. 뚜껑 부분이 산의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해서 박산향로(博山香爐) 또는 산형향로(山形香爐)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것으로는 이 백제향로가 유일하다고 한다. 향로 하면 재질과 모양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다. 이미 살펴본 도자기향로(청자칠보투각향로)부터 토기, 나무, 돌, 청동, 요즘엔 텅스텐 재질도 있다. 물론 모양도 제각각인데 박산향로는 유독 눈길을 끈다. 중국 전국시대에 발원해 한나라대에 완성된 틀을 갖췄으며, 당나라시대까지 유행하다가 맥이 끊겼다고 한다. 

 

‘신선사상’의 완벽한 표현물

 

사실 이 백제향로는 우리가 만나온 어떤 유물보다도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따라서 그 조형의 특징을 이해하려면 거기에 담긴 문화·사상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중국에서 건너온 도교사상, 그 가운데서도 신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담긴 신선사상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한나라 무제는 이런 생각에서 궁궐에 상림원(上林苑)이라는 원지(怨池)를 조성했다. 그곳에 신선이 노닌다는 삼신산(봉래, 방장, 영주)을 세우고 못을 팠으며, 온갖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 물고기를 길렀다고 한다. 백제 또한 신선사상의 영향 속에 한성시대부터 궁궐에 원지를 만들었는데, 앞서 살펴본 사비의 궁남지는 무왕이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백제의 신성사상은 앞서 살펴본 산수문전에도 나타나 있고, 금동향로는 그 결정판이 아닌가 싶다.

 

향로의 몸체는 연꽃잎으로 감싸 수계(水界)를 상징하고 물새, 새, 물고, 악어 등이 부조돼 있다. 뚜껑은 신선이 노닌다는 방장선산(方丈仙山·곤륜산이라는 설도 있다)을 묘사했고, 호랑이, 원숭이, 앵무, 사슴 등과 무언지 알 수 없는 짐승들,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새겨져 있다. 향로 꼭대기에는 큰 새가 서 있는데 봉황이라는 설이 대세인 가운데 천계(天鷄)라는 설도 있다. 이 아름다운 몸체를 용 한 마리가 입에 물어 떠받치고 있다. 용은 한쪽 다리를 옹골차게 치켜들고 있는데 내가 보기엔 이 다리가 향로 전체의 조형에 숨결을 불어넣고 있는 것 같다. 백제향로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해두자.

 

현기증 나는 아름다움

 

그런데 이 향로의 가치는 희소성에 있지 않다. 바로 현기증 나는 조형미가 이 향로의 진정한 가치가 아닌가 싶다. 박산향로가 중국에서 발원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중국에서는 다양한 모양의 박산향로가 출토됐다고 한다. 받침대와 원뿔형의 몸체·뚜껑으로 된 구조는 대부분 비슷하다. 부여박물관에는 다양한 중국 박산향로가 전시돼 있는데 이들의 높이가 대략 20~30Cm인데 비해 백제향로는 60Cm에 이르는 대작이다. 문제는 크기가 아니라 조형미다. 한 마디로 비교를 거부한다. 위덕왕대에서 백제 멸망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향로는 중요한 국가적 제사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번에도 부여 얘기로 빠져야겠다. 그곳에는 이 향로를 엄청난 크기로 확대한 복제물이 차도 네거리에 세워져 있다. 읍내 곳곳은 향로 모양과 문양으로 넘쳐난다. 부여박물관에는 백제향로와 관련한 별도의 전시실을 둬 종합적인 이해를 돕고 있다. 특히 밀랍으로 모형을 조각한 뒤 여기에 진흙을 두텁게 바르고 밀랍을 녹여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향로를 만드는 과정이 재현돼 있다. 중앙박물관에서 친견할 기회를 놓치신 분들은 시간이 나거든 꼭 부여박물관을 찾아보시라.

 

 

 

서기 660년으로 시간여행

 

타임머신을 타고 서기 660년으로 거슬러 가보자. 계백의 5천 결사대를 격파한 나당연합군이 사비 동쪽으로 밀려오고 있다는 급보가 전해지자 백제 왕실은 망국을 직감한다. 황급히 능산리 왕릉과 인근 왕실사찰을 찾은 이들은 종묘사직을 마감한 대죄를 사하는 마지막 제를 올린다. 금동향로도 이 때 마지막 향을 피워 올렸을 것이다. 나당군의 말발굽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이들은 이 국가적 보물이 적군의 손에 들어가지 않기를 기원하며 절 부속건물(공방) 바닥에 묻는다.

 

그리고 백제는 망했고, 왕실수호의 염원이 담긴 절도 적군의 손에 불타고 말았다. 그리곤 절터엔 천년 넘게 스산한 바람만 불었겠지. 후대의 발굴로 향로가 다시 햇빛을 볼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