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5. 9. 10:36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뭔가 심상치가 않다.
어제 아침까지 보았던 장면과는 분명 너무 다르다.
물높이...
고랑을 채울랑말랑 했는데 부직포 높이까지 넘실거릴 기세 아닌가.
이건 아니지 싶다.
후딱 물이 들어오는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두둑을 터 놓지는 않았는데 몇 군데 반뼘쯤 헐린 곳이 있다.
그 사이로 물이 넘친 흔적이 보인다. 일부러 물을 댄 게 아니란 얘기다.
휴대전화를 꺼내 급히 운영씨를 호출.
"물높이가 너무 높은 거 아닌지 모르겠네. 부직포를 완전 덮진 않았는데 찰랑찰랑 하네..."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좀 높은 거 같네요. 김 장로님 한테 물어보시죠"
일단 맞은편 논두렁에 물꼬를 트자마자 콸콸 대며 쏟아져 나간다.
그리고는 김 장로를 호출.
"너무 높은 거 같네요. 모판 밑에까지 물이 차는 게 정상이에요. 그래도 뿌리가 빨아들이거든요"
이를테면 '선조치 중 보고'가 된 셈인데 선조치는 제대로 된듯해 다행이다.
물꼬 바로 옆 부직포를 들춰보니 생각했던 것 이상이다.
모판은 완전 잠겼고, 나락모는 허리까지 물이 찼다.
상토에 섞인 부유물이 둥둥 떠다닌다.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선 것이렸다.
(오른쪽 작은 사진이 정상 물높이다)
하지만 뭘 더 어찌 해볼 일은 없는 듯하다.
'이미 둘이친 물' 아닌가.
어서 물이 빠지길 기다리는 수밖에...
언제부터 이 지경이 됐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아주 못쓰게 된 상황은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하나.
물꼬로 빠져나가는 물은 여전히 콸콸, 기세가 좋다.
다시 물길 들머리 쪽으로 가 흙을 쌓아 두둑을 높인다.
못자리를 한 바퀴 휘이 둘러보니 물높이가 한결 낮아졌다.
물이 찼던 흰 부직포에는 노란 송홧가루 자국이 남아
맨처음 만수위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 물높이와는 한 반뼘쯤 차이가 난다.
이제 웬만큼 물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뒷산(와우산?) 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앞 논배미 빛깔이 예사롭지 않다.
짙은 녹음 위로 연보라 빛이 물결치고 있다. 자운영이다.
콩과의 두해살이 풀이라는데, 사람으로 치면 '고단백 영양식품'이란다.
흔히 녹비라고 부르는 '풋거름'의 대표주자.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요즈음에 그리 된 건지는 모르나
씨를 받아다 뿌려두면 이맘때 쯤 저리 꽃을 피운다.
자운영(紫雲英)...
비록 순 우리말은 아니지만 어감도 그렇고, 얼마나 고운 이름인가.
사실, 녹비니 뭐니 하는 농학적 가치야 그렇다치고
나는 자운영, 그 존재만으로 충분히 눈부시고 마음이 달뜬다.
어릴 적 언젠가, 집에서 논을 두 필지 새로 샀다.
그래서 '새배미'라고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집에서 5리나 될까 제법 떨어져 있었다.
바로 옆으로 금강 지류인 강경(여산)천이 지나갔는데,
그 쯤을 보로 막아서 여름이면 멱감는 아이들로 벅적였다.
봄이 오고, 모내기를 위해 갈아엎을 때까지, 새배미는 무리지어 피어난 꽃으로 넘실댔다.
난생 처음 보는 꽃이었는데 눈이 부셨다. 괜시리 마음이 설렜다.
공선옥 소설을 좋아라 하는데, 잡문집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가 있다.
공선옥이 쓴 책은 소설이든 뭐든 무조건 사고보자는 주의지만
<자운영...>은 책제목부터가 사정없이 사람을 끌어당겼던 기억이 난다.
오늘 다시, 옥색 하드커버를 열어본다.
오월, 이맘때,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양쪽 논에는 자운영이 한창이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꼭 자주색 비단이불을 펼쳐놓은 듯, 붉은 물감을 확 풀어놓은 둣, 꽃이름 그대로 자주구름 꽃받이 꿈결같이나, 꿈결같이나 펼쳐졌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얼마 안 있어 그 고운 꽃밭을 갈아엎고 모내기할 준비를 할 것입니다. 자운영이 피어 있는 논에는 항상 독새기도 같이 자라서 독새기 있는 데는 보드라운 잔디밭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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