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22. 13:35ㆍ누리에 말걸기/<함께하는 품>
조금 전 논을 둘러보고 오는 길이다.
요즘은 아침과 저녁 두 차례 씩, 자전거를 타고 4킬로미터 거리에 흩어져 있는 논배미 물관리를 하는 게 주요일과다.
모내기 끝나고 한 달 남짓은 물대기에 바짝 신경을 써야 한다는 얘길 귀가 아프도록 들었던 터다.
그런데 올해는 ‘백년만의 가뭄’이라던가. 이 고장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라 논바닥이 타들어갈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물이 모자라긴 한가지라 속이 타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 다.
오늘만 해도 열 두 마지기(2천 4백평)가 들어앉은 샘골 농수로는 기계소리로 요란했다.
전기모터에 엔진양수기, 경운기 양수기까지 모조리 동원돼 물을 품어대기 바쁜 탓이다.
옛날에는 물꼬싸움에 박터졌다지만 이젠 펌프질 경쟁으로 그 양상이 바뀐 건가.
그나마 기계로 물을 품을 수 있으니 그게 어디냐고? 그리 말하기엔 좀 계면쩍다. 양수기로 논물 대기 시작한 지도 어언 40년 가까이 되니 말이다.
이 판국에 물레방아(무자위)나 두레박, 둠벙 따위를 떠올리는 내가 오히려 생뚱맞은 거지 싶다. 이렇게 늙다리가 돼 가는가 보구나.
그래, 어차피 늙다리 표시를 낸 김에 추억에나 잠겨보자.
경지정리가 안 돼 하늘보고 농사짓던 시절엔 논 안에 둠벙(깊은 물웅덩이)을 팠다. 아주 작은 저수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스름한 기억으로는 꽤 깊었던 것 같고. 그곳에 물을 가둬두었다가 요즘 같은 가뭄이 들면 퍼낸다.
그 때 쓰는 도구가 두레박이다. 길이는 두 자 남짓, 거룻배를 줄여놓은 모양새다. 그 네 귀퉁이에다 긴 끈을 매달아, 두 사람이 마주잡고 둠벙물을 퍼 올린다.
물이 거의 다 빠지면 얕은 물에서 파닥거리는 팔뚝만한 메기며 가물치 같은 물고기를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아무튼 그런 시절도 있었다 치고. 오늘은 또 오늘이다.
양수기들이 이렇듯 나레비 서서 물을 품어대니 수로의 물이 남아나겠나.
상류의 저수지도 수문을 닫아 건지 오래다. 콘크리트 보 근처에만 물이 고여 있을 뿐이다.
나 또한 수심이 채 30센티미터도 안 돼 보이는 웅덩이에 모터펌프 빨대를 꽂았다. 아마 한 두 시간 지나면 완전히 말라붙을 것이었다.
이스터섬에 남은 나무 마지막 한 그루를 베는 심정이 이랬을까? 이젠 관정을 파거나 하늘을 우러를 일만 남은 것인가.
그래도 벼포기는 아직 싱싱하다. 요즘 마을 주변 논의 ‘쌀나무’에는 나락 대신 이따금씩 분홍색 ‘과일’이 열려 있다.
얼핏 딸기 같기도 하고, 설익은 오디 같기도 하다. 요놈이 뭔고 하니 왕우렁이 알이다.
벼포기나 잡풀 줄기에 지름 2~3센티미터의 타원형 모양으로 1백여 개 쯤 실어놓는 것이다.
왕우렁이는 남미에서 들여온 외래종으로 생김새는 토종 우렁이와 비슷하다.
그런데 이놈이 토종과는 달리 풀을 뜯어먹고 살아 논잡초를 없애는데 그만이다.
이를테면 천연제초제인 셈. 한번쯤 ‘친환경 우렁이농법’이란 말을 들어봤을 텐데, 이놈이 바로 그놈이다.
이 마을 일대는 오랜 전부터 농약과 화학비료를 전혀 쓰지 않는 친환경 벼농사단지가 들어서 있다. 물론 우리가 짓는 논도 그 속에 있다.
처음엔 오리농법을 썼는데, 몇 해 전 조류바이러스가 전국을 휩쓸면서는 그것으로 종쳤다. 바로 우렁이농법으로 전향했다고 한다.
지금도 몇 군데 논구석엔 그때 오리를 치던 철제우리가 녹이 슨 채 남아 있다. 그런데 지금도 오리는 볼 수 있다.
농사짓다가 살아남은 오리가 몇 년 째 논을 지키고 있다는 전설이 아니다. 청둥오리 얘기다.
새끼가 부화한 지 이제 보름쯤 됐는데, 수로나 논두렁 풀숲에서 숨어 놀다가 인기척에 놀라 열 두어 마리가 우르르 헤엄쳐 달아난다.
청둥오리만이 아니고 백로나 왜가리도 터를 잡고 산다. 다른 땐 미꾸라지나 물고기를 잡아먹는데 지금 애꿎은 우렁이가 별식 노릇을 하고 있다.
이런 천연제초제 도둑놈들 같으니라고, 그게 얼마짜린 줄 알아?
아참, 왕우렁이는 열대지방이 원산지라 겨울을 나지 못한다. 그래서 모내기를 끝낸 뒤 해마다 양식장에서 사다가 논에 넣어줘야 한다.
그저께는 마지막 남은 두 마지기에 모를 심었다. 어찌하다 보니 볏모가 모자라 일주일 째 모내기를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옆 논을 짓는 이장님이 자기네 찰벼 모가 남았단다. 모판이 원형탈모처럼 듬성듬성 빠져있으니 가져다가 손모내기로 심든 말든 하란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진가 지금. 내친 김에 “그냥 이앙기로 심어주시면 안 되까요?” 했더니 쾌히 승낙.
어제 점심은 그렇게 마지막 모내기를 끝낸 턱으로 운영 씨네 집에서 ‘고기잔치’를 벌였다. 잔치래 봤자, 야외 바비큐그릴에 굽는 삼겹살이 전부다.
이장님 내외, 운영 씨와 아내 사리 씨, 귀농해서 살 집 개조공사를 하고 있다는 운영 씨 사촌동생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이장님으로 말할 거 같으면 대략 예순을 바라본다.
지난해 초 이 동네로 이사와 떡을 돌리던 날, 손수 자전거를 타고 길을 안내하며 일일이 소개를 해주시던 분이다.
아마 이사떡을 돌린 게 우리가 처음이었던 모양이라 지금도 가끔 그 얘기를 꺼낸다.
“고기 먹을 일 없으니 저는 고기나 구울게요.” 없는 실력에 집게와 가위를 들고 나선 까닭이다. 페스코(pesco)로 7년째다.
그동안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요령도 조금 늘었다. 비건(vegan)이라고 못 하리오만은 그건 술도 같이 끊을 수밖에 없으니 거기서 타협한 셈이다.
아무튼 그런다고 내일 당장 지구가 청정지대로 거듭나는 것도 아니고 실상 자기구현이요, 자기위안 아닌가.
그래서 농반진반 ‘양심적 고기거부’로 그 성격을 정리하기도 했다.
한때는 농사를 짓게 되면 내 다시 먹으리라, 내가 농사지면 온실가스(이산화탄소)를 얼마나 많이 붙잡을 건데 그깟 고기 좀 먹을 자격 있는 거 아니냐.
약한 모습을 보인 적도 있었다. 마침내 농사를 짓게 되었고, 막상 그 생각을 해보니 이건 ‘수절해온 세월’이 너무 아까운 거다.
더불어 세월의 무게 탓인지 고기를 향한 사무치는 정(?)도 시나브로 사그라들어 있다. 에잇, 그냥 계속 갈까부다.
점심상은 이제 ‘고기코스’를 지나 후식으로 매실효소 음료와 수박이 나왔다. 이장님 씨익 웃으며 신신당부.
“논에 풀 많이 났더만. 그거 너무 커서 우렁이가 못 뜯어먹어. 더 늦기 전에 빨랑 손으로 뽑아. 그리고... 모심은 지가 열흘도 넘었는디, 아직도 모를 안 때웠디야. 시간 지나면 때우고 싶어도 못 혀...”
역시 무리였나. 지금 짓고 있는 논으로 말할 것 같으면 모두 여섯 군데에 흩어져 있다.
토지대장에 올라있는 연면적은 16,841㎡= 5,103평=25.5마지기. 물론 내 땅은 한 뼘도 없고 다 빌린 거다.
그나마 운영 씨랑 둘이서 짓는데도 이리 낑낑대고 있다. 운영 씨는 운영 씨대로 옥수수, 고추 따위 밭일로 바쁘고, 나는 나대로 ‘원고농사’에 바빴다.
처음엔 그럭저럭 지을 수 있으려니 생각했는데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다. 뭐, 지금도 “이 놈의 원고만 끝내면...” 전의를 불태우고 있지만 말이다.
“모든 비용 제하고 남은 순수입을 딱 절반씩 나누는 겁니다이~” 이것저것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얼결에 시작한 벼농사다.
처음엔 밭농사를 지어볼 요량이었다. 어린 시절, 논농사로 지긋지긋하게 고생하시던 두 분에 대한 기억 탓이었다.
하지만 나와 있는 밭이 없었을 뿐더러, 정작 어떤 작목을 지어보겠다는 생각도 비어 있었다.
게다가 옛날과 달리 기계화가 많이 돼서 벼농사가 더 쉽다고들 얘기하니 그냥 그러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지난 4월, 볍씨 담그는 작업을 시작으로 예까지 온 것이다.
호남평야 언저리에서 논농사를 지켜본 나로서는 처음엔 이 고장의 논구조가 신기하기만 했다.
다닥다닥 붙은 작은 논배미들. 거기에다 세모꼴, 사다리꼴, 부채꼴, 반달꼴, 타원형, 오이형... 생김새도 자유형이다.
더욱이 게다가 논이 들어선 곳은 대부분 산자락 사이 비탈이라 논두렁 높이가 1미터도 넘는 다랭이다.
그래도 고개만 들며 아기자기한 산봉우리가 줄지어 있는 풍경이 맘에 들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야 이 고장 사람들이 ‘경지정리’ 노래를 불렀던 이유를 알게 됐다. 농기계 부려먹기가 너무 힘든 것이다.
그나저나 적어도 7월 중순까지는 논에 물을 가득 채워줘야 하는데, 불볕더위만 이글거릴 뿐 아직 비 소식은 없다.
저수지에는 아직도 흘려보낼 물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그만 타올랐으면 싶은데 참 걱정이다.
* * *
사실, 이 꼭지를 청탁 받고 많이 망설였다. 떠르르한 농사꾼이 쌔고 쌨는데 왜 하필 나야?
그러다가 생각을 고쳐먹은 건 바로 ‘익숙해진다는 것’의 미묘함을 깨닫고부터다.
도회지에서 2, 3차 산업에 종사하다가 시골살이를 하게 되면 처음엔 겪는 일 하나하나가 낯설고, 새롭게 다가온다.
어떤 일에나 감흥이 일고,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사소한 풍경조차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 때의 시각과 감수성은 시골사람이 아닌 도회지물이 덜 빠진 사람의 것이다.
하지만 2년, 3년... 그리고 10년 흐르다 보면 그런 것은 ‘일상’이 된다. 시골살이의 모든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시각과 감수성 또한 토착화되어 시골사람의 그것과 닮아간다.
내가 알기로 <함께하는 품>의 독자는 대부분 도시사람이다.
같은 농사얘기라도 도회지 사람의 시각과 감수성으로 들려주는 게 더 공감이 가고 빠르게 다가올 것이다.
10년쯤 지나 농사꾼의 정체성이 굳어진 사람은 어떤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최신형 농기계 전시회’ 같은 데를 다녀온 이야기를 신나게 풀어놓지 않을까 싶다.
도시사람들이 그런 맛대가리도 없는 얘기를 왜 들어야 하는데? 이런 생각 끝에 내가 해보마 했다.
아마도 이 글 쓴 사람이 그 차 아무개가 맞나 싶은 사람이 많았을 거다.
노동자계급의 심장부(?) 민주노총에서 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쁘띠부르주아’로 변신한 것에 당혹감을 느낄 사람도 있으리라. 나도 그랬으니까.
한 10년 전 일로 기억되는데, 울산에 있는 ㅎ중공업노조 활동가 아무개가 홀연히 전라도 벽촌 어디로 귀농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받은 충격 정도?
하긴 지금이야 나같은 경우가 흔한 일이 됐으니 그보다는 훨씬 덜 할 것이다.
아무튼 그 차 아무개는 지금 전라북도 완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살고 있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인연이 닿은 곳이다.
2005년이던가. <스코트 니어링 평전>을 읽을 때만 해도 지금 같은 상황은 그야말로 ‘꿈같은 얘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변화라는 건 적극 추구해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우연이나 부정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 얼마 뒤 ‘개인사의 격변’을 치르고 자신을 재구성하던 어느 순간에 문득 깨달았다.
노동운동가로, 이 도시에 남아 할 일이 없구나! 그렇다고 저 도시로 간들 할 일이 있으랴. 그래, 도시를 뜨는 거다.
그렇다면 신선이나 되어볼까? 그 때 떠오른 것은 ‘어머니 흙가슴’이었다.
줄곧 파먹기만 해서 앙상하고 등이 굽은 어머니를 닮은 땅, 거칠고 야윈 그 곳에 이제는 돌려줘야 한다.
내가 세상에 보시할 수 있는 남아 있다면 바로 그것이지 싶었다.
아울러 ‘생계를 위한 노동 4시간, 지적활동 4시간, 좋은 사람들과 친교 4시간’이라는 니어링의 구상도 다시 떠올랐다.
그제서야 욕심껏 들여놓기만 하고 읽지 못한 채 쌓여 있는 책들, ‘조직적 글쓰기’라는 명분에 스스로를 가둔 형식주의와 매너리즘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로지 입시만을 위한 경쟁교육에 찌들어 있는 가엾은 아이들도.
‘신선을 꿈꾸는 농사꾼’의 시골살이는 그렇게 시작됐다.
물론 행복감으로 충만한 나날의 연속은 아니다. 그걸 바란 것도 아니다.
또 ‘4-4-4 생활’이 딱 들어맞지도 않는다. 어떤 날은 8-4-0, 모내기를 한 날은 12-0-0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날엔 4-0-8이나 0-12-0도 있으니 나쁠 건 없다.
가끔은 ‘이런 삶도 있었는데 왜 모르고 살았을까’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 겨우 한 해가 흘렀을 뿐이다.
앞으로 또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무척 궁금하다. <함께하는 품>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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