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봄'을 보았다 하는가?

2013. 3. 21. 22:50누리에 말걸기/<함께하는 품>

언제까지 갈까 싶더니만 이제는 겨울추위가 걷혔다. 아직 봄의 소리를 읊조릴 만큼은 아니지만 달라진 바깥기운을 뚜렷이 느낄 수 있다. 봄기운이 몹시도 반가운 것은 지난겨울이 유난히 추웠고, 눈도 많이 내린 탓일 게다. 정말 추웠다. 오죽하면 봄나물을 찾아보기가 힘들까.

 

봄나물이 사라진 봄?

 

그게 무슨 얘기나면... 그러니까 큰 아이가 지난 주말 난데없이 냉이무침을 찾는 거다. 부러 먹이려 해도 고개를 외로 꼬던 녀석인데, 본능적으로 계절감각을 느끼나보다 싶었다. 허나 봄나물을 캐본 기억이 없다. 가게에서 사오자니 온상재배가 틀림없을 터, 그건 진짜 봄맛이 아니지 싶다. 그래, 어머니한테 가는 거다. 이맘때 쯤 어머니는 냉이 따위 봄나물을 한가득 뜯어다 도시에서 내려온 아들딸에게 한 봉지씩 건네주곤 했다. 그 정경을 믿어 의심치 않고, 곧장 20분을 달려 어머니 댁을 찾았다. 그런데 없단다.

 

글찮여도 어저께 나물 캐러 나갔는디, 너무 춰서 그랬능가 다 얼어뒤져 버렸더라. 같이 갔던 동네 아줌마들도 다 허탕쳤어.”

 

냉이무침을 바라고 달려온 우리도 허탕치고 말았다. 지구온난화로 여름은 열대기후 뺨치는데 겨울은 왜 이다지도 추운 것인지. 덕분에 난방비에 등이 휠 지경이다. 아껴 쓴다 했는데도 서울 살 적 도시가스 난방비에 견줘 곱절이 넘는다. 그나마 우리집은 심야전기라 그만하지, 기름보일러는 너 댓 배나 된다고 한다. 그러니 기름값이 무서운 노인네들은 자식들 왔을 때나 보일러를 틀 뿐, 전기장판으로 겨울을 버티는 형편이다.

 

 

그런 탓에 요즘 시골에서는 나무를 때는 화목보일러가 인기다. 문제는 너도나도 나무보일러를 쓰면 머잖아 땔감이 달리고, 덩달아 값도 치솟을 게 뻔하다. 물론 나무보일러는 게 중 자연생태계에 부담이 덜한 난방기구다. 이제 잔가지 같은 하찮은 땔감이나 적은 양의 장작으로도 난방이 될 수 있게 열효율을 높이는 일이 중요해졌다. 이에 따라 에너지 적정기술에 관심이 쏠리는 한편 이곳 완주가 로컬에너지사업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달에는 고효율 화목난로 공모전 나는 난로다행사가 열렸다. 에너지 적정기술 개발·보급에 뜻을 둔 협동조합도 곧 닻을 올린다고 한다. 철지난 얘기가 꽤 길어졌다. 지난겨울이 몹시도 추웠거니와 길기까지 했으니 이 봄이 그만큼 반가운 까닭이리라.

 

고추에 매달린 봄

 

당신에게 봄을 알리는 전령은 무엇인가. 따사로운 햇볕, 포근한 바람, 아지랑이... 이런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것 말고, 누구나 인정할 만한 뚜렷한 표식은 색깔의 변화가 아닐까 싶다. 무채색에서 화사한 유채색으로. 붉거나 노란 꽃, 그리고 신록의 새싹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른 봄날의 꽃은 보통 나무에서 피어난다. 매화, 개나리, 진달래, 벚꽃... 다들 꽃부터 피운 뒤 새순을 올린다. 반면 풀은 새싹 또는 새순부터 틔우는 게 보통이다. 아무튼 사람들은 이놈들을 보고서야 비로소 봄이 왔음을 알아챈다.

 

그런데 요즘 농사꾼들은 좀 더 일찍 을 맞는다. 석유문명 덕분이다. 비닐하우스에는 아예 겨울이 없다. 그 속에서는 한겨울에도 상추 따위 신선채소가 자라고, 딸기 같은 과일이 열린다. 일찍 시장에 낼수록 높은 값을 쳐주니 화석연료로 가온재배를 하거나, 지하수를 뽑아내 비닐위에 흘러내림으로써 냉기를 차단하는 수막재배를 한다. 이젠 과일·채소의 제철이 언제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하우스재배가 아니라도 농사철은 예전보다 성큼 당겨졌다. 이 글을 쓰고 있는 3월 초순, 봄꽃을 보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하지만 우리는 이미 달포 전에 새싹을 마주했다. 겨울 한복판이던 지난 1월말, 우리는 운영 씨네 비닐하우스에 고추모를 부었다. 보름이 지나 2월 중순이 되자 파릇파릇한 떡잎이 올라왔다. 두어 달 일찍 을 맞은 셈이다. 이제 들녘에서 새싹을 보더라도 그리 새삼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고추모가 맨 먼저, 그것도 한겨울에 봄기운을 안겨준 셈이다.

사실 난 고추농사가 이번이 처음이다. 더욱이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시작한 것도 아니다. “여럿이서 함께 지어보자는 주란 씨의 거듭된 제안에 응했을 뿐이다. 올해 전체 농사계획이 서지 않은 상황이라 적잖이 부담스러웠지만 한편으론 어찌 되겠지싶어 그러마고 했던 것이다. 고추 심을 땅과 모종을 기를 비닐하우스를 이미 마련해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네 명이 각각 2백평씩, 모두 8백평을 짓는 거다. 주란 씨를 빼고는 다들 초짜.

 

 

아무튼 한겨울에 싹을 틔운 고추모는 무럭무럭 자라나 떡잎 위로 본잎 두 장을 얹었다. 며칠 전에는 장방형 플라스틱 모판에서 자라던 고추모를 맨땅에 옮겨 심었다. 정식에 앞서 더욱 튼튼한 모로 키우려 함이다. 고추모는 앞으로 두 달 남짓 더 자란 뒤 비닐하우스를 벗어나 노지에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다. 고추농사, 그것도 농약과 화학비료, 비닐을 쓰지 않는 유기재배가 힘들다고들 말한다. 그래도 이미 시작한 거, 어쨌거나 부딪혀보는 거다. 잘못 돼 봤자 한 해 고추농사 망치기밖에 더하겠나.

 

논농사에 집착하는 뜻

 

이제 달포쯤 지나면 벼농사도 시작된다. 올해는 내심 논을 더 많이 빌려 벼농사를 크게 늘릴 생각이었다. 단서를 두긴 했지만 이미 쌀을 공급하기로 약정한 곳까지 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경작면적은 그닥 늘지 않고 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솔직히 벼농사 지어봤자 돈이 안 된다. 지난해 벼농사, 속셈으로도 손익을 두드려보지 않았다. 괜히 속만 상할 거 같아서다. 그런데 운영 씨와 공동경작 한 터라 어쩔 수 없이 정산을 했다. 우리나라 노동자가계의 월평균 소득도 안 되는 한 해 벼농사 수입. 그걸 확인하고 나니 입이 썼다.

 

그래도 논농사는 멈출 수 없다. 생존에 꼭 필요한 먹거리가 곡물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곡물자급률은 30%도 안 된다. 갈수록 쌀소비가 줄어들고 있다고 하는데 이젠 그마저 자급하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묻지마 개발바람에 도로를 깔고, 공장 짓고 아파트를 세우느라 갈수록 경작지가 줄고 있다. 그나마 멀쩡한 논에 조경용 나무를 심고, 비닐하우스 세워 채소나 과일을 기르고, 심지어 그냥 놀리기까지 한다. 벼농사 지어봤자 타산이 맞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나 자동차 팔고, 핸드폰 팔면 언제까지고 외국산 먹거리를 사먹을 수 있는가. 설령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수입식품이 과연 안전한가. 우리사회는 생존 자체와 맞닿아 있는 이런 물음에 확실한 대답도 듣지 않는 채 허겁지겁 길을 재촉하고 있는 형편이다. 쌀만 해도 그렇다. 공기나 물처럼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게 쌀이다. 하지만 너무 흔해서일까, 다들 그 소중함을 까먹고 있는 듯하다. 더욱이 쌀은 우리환경에 최적화된 식량원이자 우리문화의 원형질 아니던가.

 

이렇듯 소중한 쌀은 다들 알다시피 논에서 난다. 뿐만이 아니다. 벼농사는 그 자체로 우리사회에 큰 이득을 안겨준다. 광합성을 통한 온실가스(이산화탄소) 흡입, 홍수조절, 토양보전, 수질정화, 대기정화 같은 공익적 기능이 그것이다. 이를 돈으로 환산하면 한 해 수십조 원에 이른다고 연구도 있다.

 

 

 

내가 다른 방법으로 생활비를 벌충하더라도 깜냥껏 벼농사를 늘리려는 건 이 때문이다. 하지만 벼농사가 봉사활동은 아니니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길도 찾아야 한다. 그 방면의 책을 구해보기도 했고, 이곳 작목반과 함께 전남 벌교에 있는 강대인 유기농 벼농사단지를 둘러보기도 했다.

 

"행복, 내일로 미루지 마"

 

한편 시골에 산다고 해서, 농사꾼이라 해서 농사가 삶의 전부일 순 없다. 또한 아무리 소외되지 않은 노동이라 해도 어디 노는 것만 하겠는가. 하여 처음 맞는 농한기에 잔뜩 기대를 걸었다가 고추농사와 더불어 막을 내린 그 허망함이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농사는 한 번 시작되면 마무리될 때까지 온종일 매달리는 그런 노동이 아니다.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일하는 시간과 강도를 조절할 수 있다. 농한기는 끝났더라도 급한 일이 아니라면 짐짓 여유를 부릴 수 있다는 얘기다.

 

주란 씨는 농사철 닥치기 전에바닷바람 한 번 쐬고 오자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영록 씨가 콩밭에 뿌릴 바닷물을 뜨러 가던 날, 우리는 변산반도 격포로 떠났다. 바닷물 1톤을 받은 뒤 근처 횟집으로 들어섰다. 주문한 점심을 기다리면서 펼쳐본 일간지에 내 사진이 박혀 있다. ‘<10대와 통하는 노동인권 이야기> 펴낸 차남호 씨’. 그 이틀 전 전화취재에 응한 바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지면 머리기사로 대문짝만하게실렸다. 반주로 시킨 막걸리를 비우고 밖으로 나와 길다란 방파제 위를 거닐었다. 바닷바람은 차가웠지만 그리 춥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시절이 하 수상한 탓인지 요즘 내가 접속하는 패이스북은 개탄과 분노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패친들이 한 동안 잊고 지내던 세계, ‘삶의 최선전을 실황중계 하는 탓이다. 하지만 내가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저 좋아요를 눌러주거나, 몇 마디 공감과 응원 메시지를 보태거나, 이따금 하는 물질적 지원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다.

 

패이스북을 닫으면 나는 전혀 다른 세계 사람으로 되돌아간다. 여기는 개탄과 분노에서 비롯되는 당위’, ‘소명의식같은 거대담론의 세계가 아니다. 욕망에 이끌리고, 그걸 누리거나 혹은 좌절하는 소소한 삶의 영역인 것이다. 그걸 깨달을 때마다 조울증을 앓는 듯 적잖이 당혹스럽다. 그렇다면 이 온라인 세계를 아예 삭제해버린다? 다시 멀어지기야 하겠지만 결코 사라지진 않을 게 뻔하다. 아니 그 또한 껴안고 가야 할 우리의 현실이다. 내일이나 모레 쯤 오프라인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현장인 것이다.

 

 

나는 다만 오늘 누릴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고 다짐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내일은 그들과 함께 영암 월출산을 오를 참이다. <함께하는 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