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7. 12:45ㆍ누리에 말걸기/<함께하는 품>
계사년, 뱀띠해가 열리고 사흘이 지났건만 여적 옴짝달싹 못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다. 요 며칠 새 큰 눈이 내린 데다 강추위로 쌓인 눈이 녹지 않은 탓이다. 우리가 무슨 산골 오지마을에 사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너른 평야는 아니지만 만경강 끼고 벼농사 지을 정도는 되는 곳이다. 그런데도 ‘두문불출’이라니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게다.
시골동네, 폭설이 뭐길래...
도시에서야 아무리 눈이 쌓여도 버스정류장이나 전철역에만 닿으면 여느 때처럼 움직일 수 있다. 걸핏하면 염화칼슘을 뿌려대니 약간의 지체만 각오하면 승용차를 끌고나갈 수도 있다. 기껏해야 한 두 시간 ‘집단지각사태’ 정도 아닌가.
하지만 시골은 다르다. 고속도로 빼고는 시골동네 사전에 ‘제설작업’이란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 사고를 각오할 만큼 급한 일 아니고는 자동차 끌고 나설 엄두가 나지 않는다. 작은 아이가 다니는 읍내 태권도장은 눈 때문에 차량운행을 못해 휴관을 한단다. 유일한 대중교통인 전주시내버스야 애초부터 별 도움이 안 돼 지금껏 한두 번 밖에 이용하지 않았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눈 쌓인 마을 정경
우리가 이 쯤 되면 좀 지대가 높은 산골 동네는 아예 고립 수준이다. 장수 하늘소마을 사는 지니 씨도 패이스북에 ‘가스가 떨어졌는데, 언감생심 배달 주문도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올려놓았다. 아궁이가 사라진 지 오래다. 화덕이라도 갖추어놓지 않았다면 정말이지 끼니를 걱정해야 할 노릇 아닌가. 시골동네의 겨울이란 대관절 무엇이관데...
아주 어릴 적, 할머니가 건성으로 일러주시는 천자문을 외운 적이 있었다. 물론 책을 떼지는 못했지만 앞부분 얼마까지는 기억이 어렴풋하다. 그 중에 한래서왕하고 추수동장이라(寒來暑往 秋收冬藏)하는 대목. 다들 알겠지만 ‘추위가 오면 더위가 가니, 가을에는 거둬들이고 겨울에는 갈무리해둔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추수’ 얘기를 했었지. 그럼 이번에는 ‘동장’을 다룰 차례렷다.
그 시절 겨우살이
옛 사람들에게 겨울철을 살아내기란 다른 때와 전혀 달랐으니 진작부터 ‘겨우살이’라는 말이 생겼을 터. 강추위가 몰아치고 눈이 쌓이면 먹고, 입고, 자는 일이 녹록치 않았을 게다. 그러니 겨울이 닥치기 전에 집을 손보고, 온갖 먹거리와 땔감을 든든히 쟁여두어야 했다. 바로 겨우살이 준비다.
초가집이라면 새 이엉을 얹고, 창호지를 새로 바른 뒤 문풍지를 덧댔다. 땔감으로는 장작이나 나뭇가지, 볏짚 따위를 차곡차곡 쌓아뒀다. 먹거리는 쌀과 잡곡에 고구마, 감자를 쟁여두고, 시래기 따위 널어 말린 찬거리도 챙겨야 했다. 하지만 겨우살이 준비하면 뭐니 뭐니 해도 김장을 빼놓을 수 없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든든히 준비를 해두면 겨울은 다른 철보다 외려 안락했다. 군불을 지펴 방구들만 더워지면 두텁게 쌓인 눈이라도 솜이불로 느껴졌을 성 싶다.
‘곶감 꼬치에서 곶감 빼먹듯 한다’는 말이 있는데 겨우살이가 똑 그 짝이다. 쟁여둔 먹거리를 야금야금 빼먹기만 하니 말이다. 뭐, 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준비한 거 아니겠나. 좀 가난한 집이라도 윗방에는 수숫대로 엮은 바자울에 고구마가 그득했다. 그걸 삶아먹고, 구워먹고, 밥에 넣어 먹고, 때로는 날것을 깎아 먹기도 했다. 먼 옛날이 아니라 다 내가 어릴 적 얘기다. 조무래기들도 천장이 야트막한 초가집에 둘러앉아 달걀귀신 얘기, 도깨비 얘기를 주고받으며 겨울밤을 보냈다.
땔감, 김장 그리고 쌀
하지만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면서 '월동준비'란 말이 더 익숙한 만큼이나 그 뜻도 많이 바뀌었다. ‘땔감’이 장작·볏짚에서 연탄으로, 등유로 바뀌더니 이제는 그마저 필요 없게 되었다. 오늘날의 땔감은 다름 아닌 돈이다. 도시가스요금, 중앙난방비, 지역난방비 따위를 치를 현금 말이다. 지금 우리식구가 세 들어 사는 시골집만 해도 심야전기 보일러로 난방을 한다.
한편 온 식구가 모여 김장을 하던 풍속도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다. 크고 작은 가게에 가면 언제라도 다양한 김치‘제품’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 배추와 갖은 양념을 사는 비용과 소금에 절여 버무리는 품을 감안하면 사먹는 것이 되레 싸게 먹힌다는 얘기도 있다. 하여 특유의 잔치 분위기를 못 잊어 하는 집안에서나 김장을 하는 듯 보인다. 물론 이곳 시골에서야 아직은 김장풍속이 살아 있다. 우리집 4남매도 추위가 닥치기 전인 11월말, 어머니 댁에 모여 이젠 할머니가 된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김장잔치’를 열었다. 아무튼 찬거리는 그렇다 치고, 주식인 밥은?
요즘은 주식-부식 개념이 흐릿해졌을 뿐더러 쌀독이 비어도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다. 쌀 또한 매장에 가면 언제라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라면 같은 밀가루 제품으로 때울 수도 있고, 여차하면 밖에서 사먹어도 그만이다. 그래서 고기와 패스트푸드 섭취가 늘어나는 추세에 반비례해 쌀 소비량은 갈수록 줄고 있다. 지난 2011년 기준 1인당 쌀 소비량은 연간 70Kg 남짓이었다고 한다. 외식을 포함한 수치이니 실제 집에서 해먹는 양은 한 30Kg이나 되려나 모르겠다.
이 귀한 쌀을 어찌할꼬?
그렇다고 예서까지 ‘쌀을 더 먹자’거나 ‘우리 쌀을 먹자’는 얘기를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소비자 의식이 아니라 이른바 라이프스타일이나 농업정책에서 비롯된 바 크기 때문이다. 다만 기왕 해먹을 밥이라면 ‘좋은 쌀’을 먹자는 거다. 어떤 게 좋은 쌀인가. 어려울 거 없다. 밥맛이야 어차피 품종에 달려 있고, 영양소로는 쌀눈이 살아 있는 현미가 좋다. 무엇보다도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주지 않은 유기농쌀이 좋은 쌀이다. 내가 유기농 벼농사를 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이 사람의 건강을 지켜주고, 죽어있는 땅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유기농을 하는 거다. 유기농쌀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면 유기농 벼농사 면적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아무튼 지난해 4월부터 10월까지, 가뭄과 가을장마, 세 번의 태풍을 견뎌낸 끝에 거둬들인 유기농 쌀. “내 새끼 같다”고들 하던데 나는 솔직히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래도 구슬땀 흘려 내 손으로 만든 쌀이니 귀히 여겨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그 많은 걸 나홀로 먹어치우거나 마냥 끌어안고 있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어차피 우리식구가 일용할 양식을 빼고는 죄다 다른 사람 몫일 수밖에 없다. 그럼 어떻게? 가을걷이를 앞뒀을 때부터 고심해온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함께 나누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좋은 사람한테 귀한 걸 주고 싶은 건 인지상정 아니겠나. 농기계교육 실습 도중에 틈을 내어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마음 써주신 덕분에 첫해농사 잘 갈무리했습니다. 첫 수확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친환경 햅쌀'을 한 줌 보내드리려 합니다. 택배 받으실 주소를 알려주세요.'
나누는 기쁨, 행복했던 열흘
생각보다 반응이 뜨거웠다. 문자로, 통화로 기쁨을 함께 해주는 이가 줄을 이었다. 응답이 없는 이들까지 일일이 확인전화를 걸기는 계면쩍은 점이 없지 않았다. 사무실로 한꺼번에 보내는 게 서로 편한 경우도 있었다. 아무튼 사나흘에 걸쳐 취합된 배송대상은 150곳 남짓. 동네 방앗간에서 찧은 현미를 3Kg씩 비닐봉지에 담고, 종이상자로 포장해 택배로 보냈다. 장기투쟁 노동자들에게도 앞서 약속한 대로 작은 정성을 보탰다.
모든 게 처음인지라 일처리가 서둘고, 요령부득이어서 꼬박 열흘이나 걸렸다. 그래도 그 열흘은 무척 행복했던 시간으로 남아 있다. 슬픔을 나누면 절반이 되고, 기쁨을 나누면 곱절이 된다고 했던가. 주소를 알려주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고, 잘 받았고 맛있게 먹겠노라 고마움을 나타내는 답신 하나하나가 벅찬 울림을 주었다. 나중에 셈을 해보니 창고에 쌓아둔 쌀 40% 남짓을 그렇게 퍼주었다.
농사꾼이 지은 먹거리는 결국 도시사람들이 소비한다. 농산물은 보통 아주 복잡한 경로를 따라 유통된다. 농협이 수매하든, 현지수집상이 밭떼기하든, 대도시 농산물시장 경매를 통하든 여러 단계를 거쳐 소비자에 닿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최종 소비자는 자신이 먹는 농산물의 정체를 확신할 수가 없다.
반면 ‘도농직거래’는 흔히 ‘얼굴 있는 먹거리’란 수사가 붙는다. 복잡한 유통단계를 거치지 않고 생산자가 곧장 소비자에게 건네주기 때문이다. 누가 생산했는지 알고 먹으니 불안을 덜 수 있다. 부모나 형제자매가 농사짓는 사람은 그 의미를 잘 알 것이다. 그들이 챙겨주는 먹거리를 어찌 의심할 수 있을까.
소득은 보잘 것 없지만...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나는 거꾸로 내가 지은 쌀을 누가 먹는지 알고 싶었던 것 같다. 아니, 먹는 것만 바라봐도 행복한 그런 사람에게만 내 귀한 쌀을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첫 작품’이라서 지나치게 흥분한 탓일 수도 있다. 아무래도 좋다. 다음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이 감정이 내겐 무척 소중하다.
한편 나머지 쌀 60%의 임자도 내가 아는 좋은 사람이기를 바랐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다른 게 있다면 나눔이 아닌 ‘거래’라는 점이었다. 뭘 팔아보는 게 처음이라 여간 계면쩍은 게 아니었다. 더욱이 내게 귀한 쌀이라 해서 시장가격을 웃도는 값을 매길 순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상거래 일반이 아닌, 옛 동지이자 올챙이 농사꾼을 향한 연민이 짙게 깔려 있음을 알기에 더욱 고마울 따름이었고.
아무튼 첫해 농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값이 싼 먹거리’가 다름 아닌 쌀이고, 따라서 소규모 쌀농사로는 생계를 받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 사실을 알고도 쌀농사를 시작했으니 아쉽거나 충격 받을 일은 없다. 좋은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고도 적자를 면했다는 게 어디인가. 농사짓는 일에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내년을 기약할 수 있게 된 것도 다행이다.
‘농한기’를 아느뇨?
지금은 ‘농한기’를 지나고 있다. 땅이 생명활동을 멈추고 쉬는 때에 거기 딸린 농사꾼이 덩달아 쉬는 건 당연한 일이다. 말하자면 겨울방학 같은 거다. 하지만 일손을 놓았다고 그저 ‘놀고먹는’ 건 아니다. 농사만 한가할 뿐이지 그건 재충전의 시간이다. 새로운 농사정보를 파악하고, 농사기술을 익히는 한편 다음 농사를 위해 심신을 가다듬는다. 그렇다고 ‘농사역량강화’가 전부는 아니다.
왜 농사꾼이 되었던가. 물질적 풍요나 권력에 아등바등 매달리는 소외된 노동에서 벗어나자는 것 아니던가. 자연과 더불어 생태, 생명, 공생의 가치를 실현하자는 것 아니던가. 그러자면 우선은 내려놓고, 훌훌 벗어던져야 한다.
그래서다. 이곳 문화원이 ‘순천만 생태기행’을 간다는 걸 알고는 열 일 제쳐놓고 훌쩍 다녀왔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책 가운데 손이 가는 것들을 허겁지겁 읽어치우기도 했다. 얼마 전 수명이 다한 2G폰을 스마트폰으로 바꿨는데 내친 김에 ‘패북질’을 시작했다. 지난 2년 동안 방치되거나 공백으로 남아 있던 ‘관계망’이 일시에 복원된 느낌이랄까. 쌀을 나누려 문자메시지로 소통하던 때의 행복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면벽수도’ 하러 에까지 온 게 아니니 참 잘 된 일이지 싶다.
눈 내린 날, 마을 앞 만경강(상류) 풍경
그러고 보면 농한기는 한 마디로 유유자적(悠悠自適)의 날들이라 해야겠다. 누군가는 “농사꾼은 농한기가 짱이야”라 부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농한기가 계속될 순 없는 일이다. 추위가 걷힐 즈음이면 겨우살이도 끝나고 봄기운이 들판을 감쌀 것이다. 땅기운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훈김을 피워올리면 뭇 생명도 일제히 기지개를 켠다. 그 때 쯤이면 농사꾼도 마음이 바빠지고 농한기가 끝났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농한기는 아직 진행형이다. 아니 쉬는 틈에 처리해야 하는 농사준비를 아직 시작도 못했다. 아직 내 땅이라곤 한 뼘도 없으니 빌려 지어야 하는데, 경작지가 조정되는 시기가 바로 농한기다. 올해 내가 지을 수 있는 땅은 지금까지 3천평(15마지기) 남짓이다. 조정기간에 경작지가 얼마나 늘어날지 아직 알 수 없다. 따라서 ‘작부체계’, 다시 말해 어떤 작물을 얼마나 지을 지도 당연히 결정하지 못했다. 여지가 없지 않지만 경작지 대부분이 논이므로 올해도 주로 벼농사를 짓게 될 것이다. 여전히 올챙이 농사꾼 처지로 다른 이들, 특히 이 동네 친환경농사꾼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아직 긴장을 늦출 수가 없는 것이다. <함께하는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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