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30. 17:12ㆍ누리에 말걸기/<함께하는 품>
저번엔 100년만의 가뭄으로 애를 태우더니 이번엔 공교롭게도 가을장마란다. 벌써 보름 가까이 비가 그치지 않고 있다. 내리 쏟아붓는 건 아니고 오다가 멎기를 되풀이하는데, 햇볕 구경한 지 일주일이 넘어 간다. 일기예보 대로면 이게 9월까지 이어진다니 걱정이다.
곡식이며 과일이 실하게 여물고, 참깨며 고추 따위 제대로 말리자면 지금 햇볕 한 줌이 절실하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베풀어 주시라”고 기도하지 않았던가. 올해 스물 닷 마지기 벼농사에 뛰어든 나로서도 가슴 한 구석이 싸하다. 이삭이 패서 나락이 영글고 있는 참이라 ‘남국의 햇볕’이라도 이틀로는 턱없이 모자란 판에 어인 장마인가 이 말이다. 그나마 ‘물폭탄’으로 휩쓸어가지 않고, 우리 어머니 말마따나 순하게 내리는 걸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빗발 뚫고 달려가서 쓰러진 벼포기 묶어세워야 하는 지경은 아니니까.
벼이삭이 팬 모정 앞 논 풍경
가을장마에 발 묶인 피사리
장마에 발이 묶여 ‘팔자 좋게’ 한가한 일주일을 보내고 있지만 내심 좌불안석이다. 장마 추이도 걱정이려니와 한창 피사리를 해야 할 상황에 손 놓고 있어야 하니 안 그렇겠나. 엊그제만 해도 비가 그친 틈에 피 한 포기라도 솎아내려고 논에 나갔다. 그러나 채 10분도 안 돼 다시 빗발이 내리치는 바람에 헐레벌떡 되돌아오고 말았다. 이후 비오는 날엔 아예 나가볼 엄두도 내지 않았고, 그 바람에 일주일 넘게 피사리를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굳이 위안을 삼자면 지금 하는 피사리는 올해 농사와는 별로 상관없다는 정도다.
피사리가 주종인 논 지심매기-‘표준말’은 김매기-는 원래 세 차례에 걸쳐 했다고 한다. 첫 번째(애벌매기)는 모내기 뒤 20~30일께로 피 크기가 한 뼘쯤 되었을 때다. 이 때 다스리지 못한 피는 다시 20~30일 뒤 무릎 크기로 자랐을 즈음 매준다. 대략 7월하순~8월상순이 되는데, 뙤약볕이 내리쬐는 때라 “죽지 못해서 한다”고 할 만큼 고되다고 했다. 두 번째 지심을 매고 나면 힘든 농사는 얼추 끝났다 해서 호미를 씻어 걸어두었다. 이때가 백중(음력 7월15일) 즈음인데, 온갖 음식을 차려놓고 잔치판(백중놀이, 호미씻이)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세 번째 피사리는 그리 긴한 작업은 아닌 셈이다. 이미 두 번이나 맸기 때문에 지심이 그리 많지도 않거니와 빼앗기는 거름기도 문제가 안 된다. 그래도 피사리는 해야 하는 게, 벼보다 키가 커서 쉽게 쓰러지고 이때 벼도 함께 쓰러뜨리기 때문이다. 피는 또한 엄청난 양의 씨앗을 맺는데, 그냥 두면 논바닥에 떨어져 내년에 고스란히 싹을 틔우기 때문이다. 따라서 낫으로 밑동을 베거나 최소한 모가지만이라도 잘라내야 하는 것이다.
‘피바다’에서 허우적댄 한 달
우리 논은 여기에 견줄 처지가 못 된다. 피사리를 늦게 시작한데다 속도까지 느려 작업이 많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우렁이만 넣어주면 그 놈들이 다 알아서 먹어치우는 줄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지 우후죽순 격으로 지심이 많이 올라오면 우렁이로서도 감당하기 어렵단다. 더욱이 논물 수위가 높아야 피 생육이 억제되는데 극심한 가뭄으로 되레 바닥을 드러냈으니 오죽했으랴.
하여 샘골 가운데배미는 ‘물달개비’라는 예쁜 이름에, 부레옥잠을 닮은 지심이 논바닥을 온통 뒤덮었다. 또 모정앞 논은 고추를 닮은 ‘여뀌바늘’이 여기저기 자란 상태였다. 특히 지난해 모내기를 하고 난 뒤 농사를 작파했다는 샘골 아래배미는 말 그대로 ‘피바다’였다. 논을 묵히면서 피까지 방치하는 바람에 씨앗이 엄청나게 떨어졌고, 그게 일제히 싹을 틔운 것이다.
부랴부랴 ‘피바다’에 뛰어든 것이 7월중순. 처음엔 키도 작고, 힘들지 않게 쏙쏙 뽑혀서 네 마지기 피사리에 열흘이면 되지 싶었다. 그러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피는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또한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고,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니 그걸 뽑아내는데 드는 근력과 시간도 차츰 늘어났다. 막판에는 아예 두 손으로 피 포기를 잡고 ‘줄다리기’를 해야 할 정도였다.
어디 그 뿐인가. 때를 맞춰 섭씨 35도를 웃도는 불볕더위가 스무날 넘게 이어졌다. 일할 수 있는 짬은 아침나절 더 댓 시간뿐, 오후시간엔 아예 작업이 불가능한 폭염이었다. 오전 작업마저 나중엔 하늘이 노래지고 다리는 힘이 풀려 허우적대면서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렇게 한 달이 흐르고 있었다. 그 한 달 사이 작업을 쉰 것은 비오는 날과 외출한 날 해서 딱 나흘. 작업이 이리 소모적인 줄 알았다면 피사리를 시작이나 했을까? 그 무모함에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결국 마지막 한 두 시간 일거리 30~40평이 남은 상태에서 8월초순에 작업을 멈췄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완전히 끝내버리면 그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다.
피사리 전후
친환경 vs 제초제
한편 지심매기는 이제 우리 들녘에서 보기 드문 풍경이 되어 버렸다. 성능 좋은(?) 제초제를 쓰면 어렵잖게 지심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농업은 지난 수십 년 동안 화학비료로 땅심을 약탈하고, 땅심이 떨어져 생긴 부작용은 농약이라는 독성물질로 눌러왔다. 이른바 ‘현대과학농법’이라는 이름의 이 악순환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피사리는 ‘사서하는 고생’으로 비치게 마련이다. “친환경은 그 놈의 피사리 때문에 고생이여!” 끌끌 혀를 차는 건 그나마 양반이다. 나는 피사리하는 그 한 달 내내 귀가 따갑도록 온갖 ‘훈계’를 들어야 했다. “아, 친환경 좋지. 근디 그러면 뭐혀. 정부 수매가 멫 푼 더 쳐준다고 혀 봐야 품삯도 안 나와!”, “친환경으로 허더라도 일단 1, 2년은 제초제로 피부터 잡고 나서 허라고!” 참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돈이 문제가 아니고요. 고엽제라고 들어보셨죠? 다이옥신이란 말도요. 제초제 성분이 그거예요. 그렇게 오염된 물이 어찌어찌 해서 아주 미량만 체내에 흡수돼도 온갖 악성질환에, 태아유산-기형유발 따위 후유증이 심각해요. 그러니 제초제 쓰면 안 돼요.
그 분들이 이런 설명에 수긍할까. ‘그 동안 숱하게 농약을 쳐왔어도 조심했더니 별 일 없더라’는 나름의 경험칙에다, 화학비료와 농약을 강요해온 과거 농업정책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 이들에게 말이다. 게다가 동네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이제 갓 벼농사를 시작한 처지 아닌가. 좀 비겁하지만 섣불리 나섰다가 어떤 곤욕을 치를지도 걱정이다. 해서 “앞으로는 어차피 친환경이 대세가 될 텐데요?” 또는 “도 닦는 셈치고 하는 거죠. 뭐!” 얼버무리고 만다.
농사, 고도의 정신노동?
이제 피사리는 엄청 고된 중노동이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좀 다른 얘기를 하려고 한다. 피사리는 분명 강도가 센 노동이었고, 막판에는 뜻밖의 고민까지 안겨줬지만, 나는 ‘피사리에 중독됐다’고 할 만큼 거기에 빠져 있었다. 지심매는 일 자체가 좋았다거나 재미있었다는 게 아니다. 일하는 동안 넘나든 시간과 공간 얘기다. 논에 들어 피사리를 하노라면 그곳엔 ‘무한자유의 별세계’가 펼쳐진다. 물론 머릿속에서 말이다. 어떤 거리낌도, 제약도 없다. 어느 때는 이 생각 저 생각을 넘나들고, 어떤 날은 화두 하나에만 몰입하기도 한다. 이 사색여행의 ‘황홀경’은 이른 아침마다 뻐근한 몸뚱이를 일으켜 세우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농사짓는 것도 수행이다’는 불가의 말씀은 이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싶다. 이로부터 나는 농사야말로 고도의 정신노동이라고 믿게 되었다. 스콧 니어링은 생계노동과 지적활동을 따로 구분했지만 이렇게 보니 그리 나눌 게 아닌 듯도 하다. 지난 호에 잠깐 얘기했던 책 원고는 달포 전에 탈고를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사색여행에서 큰 도움을 받은 것 같다.
왼쪽부터 피사리 직전, 피사리 직후, 이삭팬 상태
‘진보적 귀농’이라는 것
여기까지 쓰고 나니까 내 몫의 지면이 거의 다 차 간다. 이걸로 마무리하면 지난 두 달은 온통 피사리에 파묻힌 셈이 되겠지. 물론 그렇지 않다. 크고 작은 나들이부터 벗들의 자원방래(自遠方來), 생태적 농사공동체 모색에 이르기까지 따분할 틈은 없었다. 어차피 그 모두를 시시콜콜 다룰 순 없고, 장수에 있는 하늘소마을 얘기나 해야 겠다.
우리 집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이 마을은 귀농한 열 두 집이 모여 사는 생태공동체다. 수세식 화장실과 계면활성제 섞인 세제가 없고, 화학비료와 농약 대신 순환농업을 실천하는 전국에 제법 알려진 마을이다. 여름휴가 기간이던 8월초, 일주일 새에 그 곳을 두 번이나 다녀왔다. 잘 아는 진강이네가 그 마을에 살긴 하지만 그 때문은 아니었고, 좋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생겨서다. 두 번 다 진강이네가 주요 초정자이긴 했지만.
하나는 내가 서울 구로에서 살 적 함께 했던 동네사람들이 ‘생태적 들살이’라는 이름으로 떼 지어 여름휴가를 온 자리였고, 밤새 회포를 풀 수 있었다. 또 하나는 ‘진보적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토론회(수련회) 자리였다. 나야 참석대상은 아니었지만 진강이네가 꼭 오라하고, 진안 사는 겸이네도 온다기에 술잔 앞에 두고 쌓인 얘기나 나눌 요량으로 다시 찾은 것이었다. 그런데 애초 30여명으로 예정됐던 이 작은 행사에 150명 넘게 몰려들어 주최쪽과 참가자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귀농’이라는 것이 요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만 했다. 토론회(수련회)에서는 소농, 농촌공동체, 진보적 귀농전략 세 가지 주제를 놓고 강의와 토론이 진행됐고, 질펀한 뒤풀이로 이어졌다.
“당신이 노동운동 망쳤소!”
왁자한 자리가 하도 오랜만이라 분위기에 흠씬 취해 있다가 잠깐 바람을 쐬러 나왔다. 그 때 야외테이블에서 한창 열띤 토론을 벌이던 일행 중 한 분이 날 보더니 대뜸 그런다. “차 아무개 같은 글쟁이가 똑바로 못해서 노동운동이 오늘날 요 모양 요 꼴이 됐다”고. 웃음을 머금은 표정이라 적의가 있어보이진 않았지만 대여섯이 자리 잡은 좌중의 부위기는 한껏 무거워보였다. 목소리 주인공의 얼굴과 이름표를 다시 보니 낯은 익지만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순간 ‘뉘시더라?’ ‘절 어찌 아시고?’ 같은 대사가 떠올랐지만 결국은 긴 숨을 내쉬며 “죄송하게 됐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을 뿐이다.
옛 일을 다시 끄집어낼 기분도 아니었지만 과히 틀린 지적도 아닌 탓이었다. 실제로 나는 노동운동이 오늘 위기에 빠진 데에는 내 몫의 책임도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밝혔듯이 나는 노동운동판에 남아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깨닫고 나서, 무작정(!) 도회지를 빠져나왔다. 당시로서는 힘든 선택이었지만 그건 노동운동 생애의 ‘최종적 마감’이었다. 상황이 바뀌어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나는 그곳으로 되돌아갈 생각이 없다. 그러니 다시 따지고, 변명하고 그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었던 것이다.
제가 지은 쌀, 어찌할까요?
아무튼 처지가 홀가분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요즘은 한가한 생각을 하고, 한가한 걸 읽으며, 이렇듯 한가한 글을 쓰고 있다. 지난 노동운동 시대를 갈무리하는 일이 남아 있긴 하지만 생명, 생태, 유기농 따위가 요즘의 새로운 화두다. 소외된 노동을 하지 않으니 ‘스트레스’ 받을 일도 거의 없다. 목숨 걸 일도 아닌데 안 되면 말지, 아등바등 할 필요 있나, 그러고 산다.
물론 그것은 과도기 또는 전환기 삶의 특권일 것이다. 농사꾼 꼴이 갖춰지면 누군가, 또는 어디선가 ‘사회적 책임’을 재촉할 게 틀림없다. 물론 재촉하지 않는다고 짐짓 모른 척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그런 고민거리도 생겼다. 두 어 달이 지나면 당장 내가 거둬들인 쌀을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 한다. 대략 3~4톤 쯤 될 거다. ‘유기농쌀’이라 ‘상품가치’도 높겠지만 그래봤자 ‘시장가격’을 넘어서진 못한다. 여기다 농사비용을 빼고 나면 내 품삯이나 나올까? 그래도 쌀 3~4톤은 어차피 내 뜻으로 ‘처분’해야 한다. 요컨대, 내가 지은 쌀로 누구를 먹일 것인가, 바로 그거다. 일단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이들에게는 가지 않았으면 좋겠고, 나머지는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다. <함께하는 품>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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