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1. 10. 17:34ㆍ누리에 말걸기/<함께하는 품>
엊그제부터 날씨가 부쩍 추워졌다. 마음만 있었지 아직 대둔산 단풍도 구경 못했는데 벌써 초겨울로 접어드니 적잖이 서운타. 그래도 이즈음은 한해농사를 갈무리하는 철이라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 우리 집도 어제, 널어 말린 마지막 나락을 창고에 쌓는 것으로 올해 벼농사의 대미를 장식했다.
어쩌다 보니 벼를 ‘단작’하게 되었고, 지난 4월초부터 일곱 달 동안 생태농업을 하겠다며 무던히도 손일에 매달려왔다. 물론 워낙 일손이 모자라니 품이 많이 드는 일은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로터리와 써레질, 모내기, 수확작업 따위가 그렇다. 하여 모내기 때도 그랬지만 이미 끝난 수확작업 또한 싱겁기가 그지없었다.
추억의 가을걷이
수확작업이라 하면 벼 베기부터 볏단 말리기, 바심(탈곡), 나락 까불기로 이어지는 과정을 일컫는다. 예전엔 그게 열흘 남짓 걸리는 꽤 품이 드는 일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벼 베기에는 일꾼들이 북적이면서 청명한 가을날을 달뜨게 했다. 걸은 반찬과 막걸리가 곁들여지는 들밥은 이 세상 최고의 맛이었다. 흥에 취해 노랫가락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벼 베기 하루 전, 온종일 숫돌에 낫을 갈았다. 인근 군부대에서 ‘농번기 대민봉사’ 명목으로 벼 베기를 도왔는데, 우리 집에 배정되는 병사 수십 명의 작업도구였다. 베어낸 벼는 한 아름씩 볏단으로 묶어 말리게 된다. 처음엔 논바닥에 한 줄로 세워 말리는 ‘줄가리’로 시작해 시일이 지나면서 이삭을 안쪽으로 마주토록 해 ‘Y’자 모양으로 예닐곱 단을 쌓는 ‘세발가리’, 열십자 모양으로 쌓는 ‘네발가리’ 따위로 모양을 바꿔가며 말린다. 적당히 말랐다 싶으면 바심을 한다.
바심은 타작, 탈곡이라고도 하는데 타작(打作)은 김홍도의 ‘타작도’에 나오듯 ‘개상’이라는 나무에 볏단을 내리쳐서 나락을 떨어내는 전통적 방법에서 비롯된 말이다. 근대 이후로는 그 방법이 홀태(그네)로 진화했다. 얼레빗처럼 만든 쇠붙이를 나무틀에 매단 연장인데, 빗살에 벼이삭을 넣고 잡아당겨서 나락을 훑어낸다. 이어 일제강점기 즈음에 나타난 바심 도구가 ‘호롱기’다. 공식용어로는 어감도 이상한 족답탈곡기(足踏脫穀機)라 하는 모양인데 좀 입맛이 쓰다. 아무튼 발판을 연신 밟아서 ‘U’자 모양의 굵은 철사가 촘촘히 박힌 원통을 돌리는데 이때 나는 소리가 ‘호롱호롱’으로 들려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뱅그랭글 도는 호롱기에 벼 이삭을 들이대 나락을 떨어낸다. 이 호롱기에 여러 편의장치를 덧대 개선하고, 경운기나 내연기관을 연결해 벼이삭을 터는 기계가 탈곡기다.
콤바인의 빛과 그림자
이렇듯 벼를 베서 말리고, 탈곡을 하기까지는 적어도 열흘 남짓이 걸렸다. 그런데 요즘은 이 기나긴 과정이 단 번에 이루어진다. 그것을 가능케 해준 혁신적인 기계가 바로 콤바인(수확기)이다. 자체엔진을 달아 캐터필러(궤도바퀴)로 움직이는 탈곡기라 생각하면 된다. 벼 베기부터 볏단 이송, 탈곡이 일관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수확작업 때 내가 한 일이라곤 논 들머리와 귀퉁이 쪽을 미리 베어내 콤바인이 거리낌 없이 방향전환을 할 수 있도록 한 게 다였다. 콤바인이 움직일 때는 그냥 지켜보면서 뜻밖의 상황에 대비하면 되었다. 그러니 싱거울 밖에. 차라리 허망하다고 해야 할까? 문제는 콤바인이 순조롭게 작업할 수 있도록 미리 논바닥을 잘 말려놓아야 한다는 점이다. 물빠짐이 안 좋은 논은 늦어도 8월부터 바짝 신경을 써서 논물을 빼내고 관리해야 한다. 초보 티를 내느라 논을 제대로 못 말려 콤바인 작업을 한 어르신한테 지청구를 들어야 했다.
아무튼 거둬들인 나락은 햇볕에 적당히 말린다. 이즈음 농촌의 회색 포장도로에는 드문드문 나락이 널려 있다. 바닥이 판판한데다 복사열까지 내뿜으니 이보다 좋은 자연건조장을 찾기 어렵다. 물론 전기건조기를 써서 말리는 방법도 있지만 에너지를 그렇게까지 허투루 쓸 일은 아니지 싶다. 나락이 널린 길을 지날 때 운전자들이 조금만 조심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이틀에서 사흘 남짓 말린 나락은 마대자루에 담아 보관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방아를 찧는다.
그렇게 해서 올 한 해 우리가 거둬들인 나락이 6톤 남짓이다. 그 가운데 1,5톤은 곧장 농협에 수매를 했고, 나머지는 벼농사를 함께 지은 운영 씨와 똑같이 나눴다. 지금 우리 집 창고에는 나락 2.5톤, 그러니까 일반 벼 56포대, 찰벼 8포대가 쌓여 있다.
밀·보리를 심은 뜻은
이건 농사의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이다. 생명을 지닌 것들은 철을 따라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한 동안 숨을 고른 열매는 때가 되면 다시 싹을 틔운다. 가을걷이가 마무리 된 지금, 알곡을 키워낸 들판은 텅 비어 있다. 어떤 논은 내년 봄까지 거친 바람을 맞으며 쓸쓸하게 이 겨울을 날 것이다. 그런데 물빠짐이 괜찮은 논 가운데는 더러 겨울에도 생명을 품는 곳이 있다. 이른바 이모작이 그것. 이 고장에서는 주로 양파나 마늘을 이모작 재배한다. 그게 외려 벼농사보다 수익이 낫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바닥에 비닐을 덮는 멀칭을 당연시 한다. 나아가 퇴비를 듬뿍 넣고도 화학비료를 주어 알뿌리를 키운다. 이 점이 걸리는 나로서는 양파·마늘재배가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결국 보리와 밀을 심었다. 벼농사와 비슷하게 농약과 화학비료 쓰지 않는 재배법이 있을뿐더러 그것만으로 땅심이 길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샘골에 몰려 있는 논은 물빠짐이 좋지 않아 맥류를 재배하기 어렵다. 학교 앞, 모정 앞 두 곳만이 가능하다. 게다가 처음이다. 차분히 영농교육을 받을 틈도 없었고, 재배법을 다룬 문헌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태평농법’을 다룬 책 두 권을 읽고, 인터넷 공간을 뒤져 생태적 재배법을 대강 확인할 수 있었다.
요컨대 벼를 베기 2~3일 전 밀·보리 씨앗을 뿌린 뒤, 콤바인으로 볏짚을 잘게 썰어 덮어준다는 것. 그러면 햇빛을 받지 못한 잡초가 못 견디고, 볏짚은 나중에 밀·보리의 거름이 되는 원리다. 아울러 내년 봄 밀·보리를 거둬들일 때 바순 밀·보리 짚은 벼의 거름이 된다. 마을이장을 통해 어렵게 보리와 밀 종자를 구했다. 비료살포기를 빌려 삽시간에 파종을 하고 벼를 수확한 것이 지난달 30일. 엊그제는 농업기술센터에서 관리기를 빌려 물고랑을 내는 동시에 흙을 덮어주었다. 이제 새봄이 오면 학교와 모정 앞 논에는 밀·보리의 푸른 물결이 일렁일 것이다.
사실 7백 평 땅에 밀·보리 길러봤자 그 수익은 뻔한다. 게다가 보리는 올해부터 정부수매가 폐지됐고, 밀 또한 판로가 마땅치 않은 실정이다. 그런데도 굳이 밀·보리농사를 짓고자 한데는 또 다른 까닭이 있다.
더불어 가꾸는 ‘생태농사’
이 고장에는 ‘한울’이라는 꽤 오래된 생협이 전북(전주)지역을 거점으로 움직인다. 요즘 일부 생협이 지나친 수익사업에 매달리면서 뜻있는 사람들의 우려를 사고 있다. 하지만 한울은 생활협동조합의 원칙을 지키려 애쓴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업설명회 비슷한 모임에 나갔다가 얼떨결에 ‘친환경 생산자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한울생협은 친환경 농산물을 유통한다. 그런데 잡곡 공급이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생산자모임에는 ‘이웃린’이라는 사회적 협동조합도 함께 하고 있다. 여기서는 우리밀과 이 고장에서 나는 부재료를 써서 천연 발효빵을 만들고 있다. 내가 보리를 재배할 뜻을 내비치니 밀도 함께 재배해서 공급해달라는 거다. 내가 밀·보리 재배를 마음에 두고 애써 길을 찾아보게 된 것은 이 때부터다.
얼떨결에 한울생산자모임에 가입했다고 했는데, 실은 주란 씨 영향이 컸다. 주란 씨는 우리가 여기로 내려올 때 어찌어찌 알게 된 사이다. 노동운동 하는 남편, 초등학생인 딸과 더불어 분토골에 흙집을 짓고 살아온 지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농약과 화학비료는 물론 비닐도 쓰지 않는 농사로 밭 2천 평을 짓고 있다. 지난여름, 운영 씨와 주란 씨가 ‘친환경농사 네트워크’를 추진하면서 처음 얼굴을 마주했다.
셋이 만난 자리에서, 생태농업을 위한 정보를 나누고 인터넷카페(고산 행복한농장, http://cafe.naver.com/gshappyfarm)에 저마다 농사짓는 얘기를 올려 공유하기로 했다. 주란 씨는 한 발 더 나아가 제대로 생태농업을 하려면 먼저 제대로 알아야 하니 함께 공부를 하자고 했다. 공부라니… 그리 내키진 않았지만 마다할 명분이 있어야지. 이리 하여 ‘친환경농사 네트워크’는 공부모임 성격이 짙게 되었다. 그 동안은 유전자조작농산물(GMO) 관련 책을 정해 한 달에 한 번 세미나를 열어왔다. 그 다음으로는 저비용 친환경 유기농업, 자연재배를 주제로 다룰 참이다. 물론 이론공부에만 그치지 않는다. 생태농업에 보탬이 되는 정보를 찾아 실제 농사에 적용하고, 토종 씨앗을 찾아 되살려보자는 데도 뜻을 모았다.
붕어섬에서 고구마 캐기
시골 살이 2년 남짓에 이제 초보 농사꾼의 삶은 그럭저럭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때로는 짐짓 여유도 부려본다. 11월 첫 토요일이던 그제는 진안 사는 겸이네 고구마 수확작업 도왔다. 운암댐을 만들면서 옥정호가 생겼고, 외얏날(임실군 운암면)이라는 마을은 그 호수의 섬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생긴 모양새를 따서 붕어섬이라 부른다. 민주노총에서 같이 일하던 겸이네는 지난 2001년 홀연히 귀농하여 그 섬에 터를 잡았다. 몇 해 전 진안으로 이사했지만 여전히 그 섬에 친환경 고구마 밭을 일구고 있다. 얼마 전 집수리를 하다가 떨어져 어깨 인대를 다쳤다고 한다. 힘을 쓰기가 어렵겠다 싶어 바쁜 틈을 냈던 것이다.
작은 엔진을 장착한 거룻배로 호수를 건너 외얏날에 이르니 1천 평 남짓한 고구마 밭에서 대여섯 명이 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가을걷이로 바쁜 철이라 일손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장수에서 농사짓는 진강이네도 와서 거들고 있다. 그는 지금 진보정당 농업위원회를 조직하는 데 애쓰고 있다. 아울러 뜻있는 농사꾼들이 가꾼 친환경 먹거리를 모두어 장기투쟁 노동자들을 돕고 있다. 나도 쌀을 얼마간 내놓기로 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거룻배로 고구마를 실어 나르기 어려우니 막걸리 한 잔 할 짬도 없이 다그친다. 다행히 어둑어둑 해질 때쯤 일이 마무리됐는데 100상자 남짓 거둬들였다. 경운기에서 거룻배로, 거룻배에서 트럭으로, 트럭에서 창고로 잇따라 무거운 짐을 싣고 내렸다. 늦은 저녁을 먹고, 밤이 이슥토록 술잔을 기울이며 풀어놓는 쌓인 얘기가 한 짐이다. 어떤 시인은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읊었는데 똑 그 짝이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 지금은 월요일 오후, 2주 짜리 농기계교육을 받고 있다. 아무리 친환경 농사라지만 일손이 귀하니 어쩔 수 없이 농기계를 쓸 수밖에 없는 탓이다. 이론 강의시간에 강사 눈치를 봐가며 이 글을 마무리하는 중이다. 반평생을 원고마감 스트레스에 시달렸는데 농사꾼이 되어서도 거기서 해방되지 못했으니 서글픈 일이다. 얼마 전 탈고한 책은 편집이 끝나 지난 주말 표지시안과 교정지를 보내왔다. 애초 전국노동자대회에 맞춰 낼 계획이었는데 삽화작업이 지연되는 바람에 발행이 조금 늦춰졌다. 독자들이 이 글을 볼 때쯤엔 그 책 <10대와 통하는 노동인권 이야기>가 나와 있을 지도 모르겠다.
이제 겨울이 성큼 다가올 것이다. ‘농한기’라는 용어는 차츰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시설채소며 특수작물, 축산 따위 이른바 고소득 작목에 매달리노라면 여유를 찾기 힘들다. 나야 그런 쪽과는 담을 쌓을 생각이니 그나마 겨울의 여유를 누릴 수 있으려나. <함께하는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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