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출사표'

2012. 7. 10. 14:59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평화주의자에겐 미안하게 됐다. 뭐,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고 해서 내가 전투적이거나 군사문화에 젖어있는 인간은 아니다.

다만, 나름대로 절박함을 나타내자니 이게 맞춤하다 싶을 뿐이다. 뭔 말인고 하니...

어제부터 다시 전투를 시작했다. 전장은 샘골 아랫배미. 작전명- 피말리는 아침(피무리 잔당 섬멸작전).

 

지난 토요일, 운영 씨가 탱크(제초기)를 몰아 피무리에 포격을 퍼부었지만 살아 남은 잔당이 엄청나다는 첩보가 입수됐다.

포격이 끝난 뒤 육안으로 확인한 상황도 첩보와 비슷했다.

우리측 민가(벼포기)에 은신하고 있는 피무리의 수가 만만치 않았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우리측 민간인의 저항력을 믿고 그냥 지켜볼 것인가. 아니면 전비를 더 들여서라도 피무리  잔당을 소탕할 것인가.

물론, 내버려 두더라도 민간인들은 그럭저럭 살아 남을 것이다. 저들에게 부대껴서 좀 헐벗긴 하겠지만 말이다. 

막대한 전비를 투입하는 것도 부담이다.

한 가지 걸리는 건 외부세계의 비난여론이다. 

"위기에 처한 민간인들을 저렇게 계속 방치할 것인가" 항의성명이 빗발치겠지.

이 또한 무시전략으로 나가면 한 동안 시끄럽다가 이내 잦아들 테니 그리 걱정할 게 못 된다. 

뭐, 외부세계 눈치보면서 전쟁해야 하는 건 아니잖는가.

하지만 이렇듯 제 편할 대로만 생각할 게 아니다.

무엇보다 민간인들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가?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 끝내 피무리 잔당에게 완전히 점령되면 어쩔 텐가?

다행히 점령은 면하더라도 민간인 사상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리되면 그 동안 투입해온 전비가 그냥 허비되는 거 아닌가. 

더욱이 내년 이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점령을 면한다손 치더라도, 잔당들은 분명 엄청나게 세력을 불릴 것인다.

전투가 없는 동절기에 지하로 잠적했다가  내년에 다시 엄청난 기세로 발호한다면 그걸 어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잔당소탕이 답이다!

사실, 잔당소탕전은 반드시 이기는 싸움이다. 다만 얼마나 시간이 걸릴 지가 문제일 뿐.

그리고 어제, 마침내 피무리 잔당 토벌작전은 개시됐다.

 

탱크 포격 전 

 

탱크 포격 뒤

 

소탕작전이라지만 무기체계는 보잘 게 없다. 솔직히 무기는 얼어죽을... 적수공권! 맨손에 맨주먹이 전부 아닌가.

하긴 그냥 맨주먹은 아니다. 검은색 코팅장갑을 끼는데 이게 보기보다 전투력 향상에 적잖이 도움을 준다.

일단 맨손으로 각개전투를 하자면 거친 모래나 자갈 따위를 긁다가 손끝을 베이기 십상이다.

어쩌다 단단한 땅을 긁기라도 하면 손톱이 갈라지거나 들떠 뻐근한 통증이 온다.

이런 정도의 부상으로도 전투력은 크게 감퇴할 수밖에 없다. 

코팅장갑은 이런 악조건을 상당히 완화해준다.

특히, 심리적 안정감이야말로 코팅장갑이 지닌 강점이다. 

이를 테면 안전장구 효과 같은 것이다. 혹시 그라인딩 작업을 해본 사람은 이게 무슨 뜻인지 금새 알아차일 것이다.

보안경을 쓰고 할 때와 맨 눈으로 할 때의 차이는 엄청나다.

보안경을 쓰지 않으면 언제 티끌이 튀길지 불안하다. 그래서 자세가 엉거주춤이 되기 쉽고, 작업능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코팅장갑이 똑 그렇다. 맨 손으로 일하다 조금이라도 다치거나 통증을 느낀 경험이 있는 경우, 손놀림이 조심스러워지고 또 다칠까봐 불안해진다.

하지만 이 놈을 끼고 나면 그런 부담이 한결 줄어드니 손놀림도 과감해진다. 실제 해본 결과도 그랬다.

무기체계 얘길 하다가 옆길로 새고 말았는데, 아무튼 열악한 조건에서 작전은 개시됐다.

 

오늘로 이틀째, 전체 작전구역 800평 중에서 어제 오늘 100평이나 토벌했을까?

어제는 두 시간, 오늘은 네 시간 남짓 작전을 수행했다.

구역에 따라 잔당이 듬성듬성 한 곳이 있는가 하면, 빽빽히 들어찬 곳도 적지 않다.

다른 어떤 전장보다도 피무리 군사가 많은 지라 토벌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작전수행 반경도 네 줄로 다른 곳보다 한 줄 줄였다.

기본적으로 탱크가 지나간 자리에는 적군의 시체가 널부러져 있고, 잔당들은 민가 사이에 은신해 있다.

물론 피무리가 눈에 띄지 않는 지점도 있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적군이 많이 눈에 띈다.

어떤 곳은 빽빽히 들어찬 게 이건 '잔당' 수준이 아니고 숫제 '본당'이라 불러야 할 판이다.

가히 '밀림전투'를 방불케 한다.  그야말로 '피 말리는 접전'이 펼쳐진다.

자연, 시간이 지체된다. 벌써 50평은 탈환했어야 할 시간인데 고작 20평 남짓에 불과하다.

작전을 중단하고 휴식하는 시간이 잦아진다. 병사들의 피로도가 그만큼 높다는 얘기다.

토벌작전을 잠시 중단하고 본부로 귀환하라는 무전연락이 도착했다. 작전개시 네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더욱이 병사들이 많이 지쳐 있으니 오늘은 이것으로 작전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