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6. 18:33ㆍ누리에 말걸기/풍진세상(風塵世上)
보름째 속이 시끄럽다. 제새끼에 대한 연민, 비루하고 타락한 새태에 대한 역겨움, 못난 짓을 어찌하지 못하는 언짢음... 하긴 세상사, 모든 게 내맘 같을 수야 없겠지. 그래도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다. 이 글을 언제쯤 세상에 터놓을 지 모르겠으나 일단, 구체적 사실과 흐름을 있는 대로 적어두려 한다. 상황도, 감정도 아직 깔끔하게 추슬르지 못한 처지이니 털어놓을 만하게 생각이 간추려지지도 않았다. 그저 갑갑할 따름이지.
그러니까 일이 터진 건 지난 9월20일. 중학교 1학년인 큰 아이가 이른바 '학원폭력'에 맞닥뜨렸음을 우연히 알게 됐다. 이른바 '금품갈취'를 당한 낌새를 챈 것. 아이는 처음엔 사실을 감추려고 애를 썼다. 사실이 알려지고, 사건화하는 상황을 몹시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사실은 확인해야 하겠기에 빈틈을 잡아가며 꼬치꼬치 캐물었더니 눈물을 쏟으며 체념한 듯 저간의 사정을 털어놨다. 요컨대, 아이를 속이고 윽발질러 세 차례 돈을 '빌려' 갔다는 얘기였다. 더욱이 '가해자'로 지목된 아이는 다른 아이들을 때리는 바람에 이미 두 차례나 징벌을 받은 상태였다. 두 차례 징벌이란 한 달, 또는 두 달 동안 대안학교에 '유배'를 다녀오는 조치.
머릿속이 복잡하고 아득해졌다. 아이들 사이의 일이라지만, 그것은 이미 '학교폭력'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회문제'였다. 여론매체가 기회 있을 때마다 떠들어대고 사건이 끊이지 않는. 하지만 세상일이 다 그렇듯 '내 일'이 아닌 다음에야 좀체 관심을 쏟기 힘든 법이다. 제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 눈에 불을 밝히게 되는 거다. 처음 당하는 일이어서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무엇이 사태의 핵심인가.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해학생'에 대한 징계제소? 일벌백계? 재발방지? 격리조치? 선도?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들먹여져서 낯익은 용어들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궁극목표는 물론 아이를 보호해서 사건 이전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지만 그 방법은 쉽게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나왔다. '고자질쟁이' 가 된 것에 대한 자책과 창피함, 흔히 거론되는 보복에 대한 두려움 따위가 뒤섞인 반응인 듯 보였다. 체념하듯 저간의 사정을 털어놓으면서 아이는 학교와 자신을 잇는 끈도 놓아버렸음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아무튼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등을 떼미는 건 섣부르겠다 싶어 사건 다음날은 몸살감기를 핑계로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칭병을 한 것은 어떤 식으로 사건을 공식화할 지 판단이 서지 않은 까닭이었다. 주말 동안 생각을 가다듬은 뒤 월요일에 학교를 찾아 사건을 공식화할 생각으로 그 다음날(금요일)도 병가를 내도록 했다. 그런데 아이 엄마가 담임교사와 통화하는 과정에서 사실을 털어놓고 말았다.
결국 사태가 생각지 않았던 방향으로 불거져버렸다. 담임교사는 사건개요를 듣고는 곧장 관련된 아이 셋을 불러 '진술서'를 쓰도록 했다. 이에 당황한 아이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와 항의했다. 논 일을 하다가 전화를 받고 집으로 가봤더니 그 사단이 벌어지고 있었다. 몰려든 아이들의 주장은 우리 아이가 거짓말로 자기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아이를 대면케 해달라는 것이었다. "너희들 심정은 잘 알았다. 우리 OO가 너희들 만나기를 원치 않으니 사실관계는 나중에 절차를 밟아 따져보기로 하되, 만약 OO가 너희들 얘기대로 거짓말을 했다면 그에 따르는 응분의 조치를 내리도록 하자"고 아이들을 달래 돌려보냈다.
이렇듯 한바탕 난리굿을 치르고 나니 대략 가닥이 잡혔다. '가장 교육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야 겠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사실을 정확히 규명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되 그 방향은 '가해학생'을 벌주고 떼어놓는 징벌이 아닌 '교육적인 조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학교 차원에서 내릴 수 있는 교육적 조치가 무엇이 있는지 그 때까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사건에 관련된 아이들 모두가 오해를 풀고, 잘못한 일은 서로 사과한 뒤 화해를 하도록 이끄는 한편 그 뒤로도 좋은 관계를 이어가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아이 엄마도 처음엔 "가해학생을 격리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으나 내 얘기를 듣고는 그 방향에 동의했다. 그러나 교육의 원칙에 부합하는 방향이라 대놓고 부정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비현실적이고 감상적이라 것이었다. 그러니 가해학생을 떼어놓아야 한다는 생각은 불씨가 살아 있었다.
그리고 월요일부터 지루한 일주일이 시작됐다. 담임교사와 상담교사가 우리집에 찾아와 아이와 얘기를 나눴고, 우리는 학부모 자격으로 학교를 찾아 필요한 '사건처리 절차'에 응했다. 물론 우리는 "가해학생을 징벌하는 방식의 조치가 이루어지는 걸 원치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교사들로 이루어진 선도위원회와 학내외 관계자로 구성된 '학교폭력위원회'가 잇따라 열려 대책을 논의했다. 가해학생에 대한 조치를 최종결정하는 학교폭력위원회에서도 발언기회가 주어지기에 같은 취지로 얘기를 했다. 다행히 '피해학생 부모'의 의견을 존중해 징벌을 최소화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학내봉사활동과 공개사과, 학교내 상담프로그램, 외부 전문기관의 심리상담(치료), 경찰서 특별교육 이수 등이 그것. 우려했던 전학이나 대안학교 '유배' 같은 조치는 내려지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건 '해피앤드'가 아니었다. 교육현장은 그야말로 '위선 덩어리'다. 사람들은 "요즘 참다운 스승을 찾을 수 없다"고 한탄하지만 참다운 어버이 찾기도 어렵긴 마찬가지니 누워 침뱉기다. 세태가 많이 변했으니 '사표(師表 )'라는 걸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이번에 겪은 교직사회는 참담했다. 학교에서 '교육'이라는 관점을 찾아보기 힘든 건 서글픈 일이다. 이 기간 중 내가 학교에서 직접 겪었던 교사들은 교사라기 보다는 수사관, 검사, 행정관료 따위였다. 가해자로 지목된 아이들, 호통만으로도 눈물을 훔치는 고작 열 네 살 아이들을 불러다가 겁주고, 유도신문하고... 이건 영락없는 범죄용의자 신문이었다. 교사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는 '충고'까지 들었다. "그 아이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 선생인 나까지도 모함하는 헛소문을 낸 아이다. (격리해야 마땅한) 그런 아이를 감싸고 돌다니 이해가 안 간다. (보복이 두려워) 그 아이 발밑에 들어가 꼬붕노릇 하게 하는 식으로는 당장 피해를 모면할 수 있지만, 결국 당신 딸도 그 아이에게 물이 들어 비슷한 신세가 된다." 대략 이런 얘기였는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 초면인 그 분한테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어디 그 뿐인가. 우리 아이한테 "학교 계속 다닐지 말지 판단해서 다음주 목요일까지 선생님한테 얘기해달라"고 한 교사도 있었다. 그런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지 걱정이 된다. 이 노릇을 어이한단 말인가. 물론 직접 만나본 교사들에 국한된 얘기고, 그렇지 않은 교사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답답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무튼 "가해학생을 격리하지 않으면 결과는 뻔하다"는 '원래생각'으로 되돌아간 아이 엄마는 결국 아이을 학교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내가 내놓은 해결방향이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는 주변학보모들의 의견도 적잖이 작용한 듯 하다. 게다가 일이 불거졌을 때부터 학교에 가기를 거부해온 아이까지, 두 모녀가 '의기투합'을 했으니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있나. 속은 타들어가고, 자꾸만 '말을 물가로 데려갈 순 있으나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하진 못한다'는 옛말만 머릿속을 빙빙 돌 뿐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기대할 것 없는 그런 학교에 아이를 보내봤자 뭐하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전교생이 120명, 한 학년이 40명 남짓한 '꼬딱지 만한' 학교에서, 시련에 맞서보기도 전에 지레 도망가는 결과로 끝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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