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13. 19:07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벼농사가 참 싱거워졌다. 그 하이라이트라 할 모내기, 가을걷이도 그렇다. 동네가 들썩이고, 뭔가 가슴을 설레게 하던 그 풍경들은 이젠 영영 다시 보기 어렵게 됐지 싶은 게 아쉽고, 안타깝다. 반나절만에 세 마지기 벼 가을걷이를 뚝딱 해치우고 난 소감이다.
늦잠을 자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린다. 운영 씨다.
"방금 연락왔는데, 오늘 재실논 벼 벤다네요..."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벼 주인이과 상의도 없이 벼베는 날짜를 정했다니 말이다. 허~참... 요즘세상 벼농사 질서가 그리 변했나? 콤바인(수확기) 작업자가 자기 '구역' 작업일정을 짜고, 그걸 벼 주인에게 '통지'하고, 웬만하면 그리 된다. 그래도 작업당일 아침에 알려주는 건 좀 거시기하다. 하긴 예전처럼 작업준비가 복잡하지 않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게다가 그저 '벼베기'가 아니라 옛날로 치면 열흘에서 보름쯤 걸리는 일거리를 한나절만에 해치우는 공정이다. 그것이 콤바인이라는 기계의 엄청난 위력이다.
그러니 화들짝 놀랄 것도 없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작업은 몇 시쯤 시작한대요?"
"지금 9시니까... 곧 시작할 거 같아요. 저는 11시에 교회행사가 있어 가봐야 하는데, 이거 참..."
"알았어요. 준비해서 바로 그쪽으로 갈게요."
그제서야 후다닥 세수하고, 작업복 갈아입고, 누군가 해동해 놓은 떡 한 쪽을 꿀꺽 삼키고는 자전거에 올랐다.
콤바인 작업을 위한 준비는 별 게 없다. 기계가 들어갈 자리와 모서리처럼 기계를 돌릴 자리의 벼를 미리 베서 공간을 확보해주면 되는 것이다. 서툰 낫질로 사각 사각 벼를 베기 시작했다. 재실논은 폭이 좁고, 오이 모양이라 다랭이마다 두 곳 씩 모두 네 곳을 베어내면 끝이다. 그것이 요즘세상의 '벼베기'다.
지난번 논두렁 풀베기 작업 뒤 처음으로 운영 씨와 더불어 논일을 했다. 덕분에 사람이 등장하는 사진을 얻었다.
▲ 기계 진입로 벼베기를 마친 재실논 풍경.
▶ 운영 씨가 콤바인이 들어갈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벼를 베어내고 있다. 바로 옆 감나무에서 딴 홍시를 먹는 모습이 설핏 잡혀 있다.
준비가 끝났으니 이제 콤바인이 논으로 들어설 차례. 콤바인 주인이자 운전자는 우리 앞집 어르신. 일흔을 바라보고 있지만 아직은 너끈히 기계를 다룰 수 있을 만큼 근력은 남아 있다. 콤바인 뿐 아니라 트렉터, 이앙기 따위 농기계를 갖추고 우리처럼 농기계 없는 집 일을 도맡아 한다. 물론 거저 해주는 건 아니고 작업비를 받으니 일종의 '도급'인 셈. 그런데, 작업을 시작하고 채 10미터도 못가 콤바인이 작동을 멈췄다. 어딘가가 고장 난 모양이다. 이것저것 만져봐도 작동이 안 되니 하는 수 없이 휴대전화를 꺼내 수리기사를 부르는 눈치다. 수리기사가 오는 사이 우리는 바로 옆 감나무에서 딴 홍시의 단맛을 빨아들인다. 점심 먹으러 갈 시간을 내기도 어렵게 되었으니 이쪽으로 배달해달라고 주문했다.
기계 수리작업은 30분 넘게 이어졌다. 부품을 뜯어내 두드리고 조인 다음 다시 장착하는 작업이 꽤 어려워 보인다. 그 사이 주문한 점심이 도착했다. 식당 주인 아주머니가 직접 승합차를 몰고 왔다. 짐칸 뒷 문을 여니 점심 바구니가 세 개나 된다. 그 중 하나가 우리 거다. 메뉴는 동태찌개. 콘크리트로 포장한 동네 진입로에 밥이며 반찬을 늘어놓고 먹는데, 예전에 먹던 그 '들밥'의 맛이 아니다.
점심을 다 먹기 직전에 수리는 끝이 났다. 결과를 점검하려는지 수리기사가 아예 콤바인을 몰고 수확작업을 한다. 두 마지기 쯤 되는 아랫 다랭이 벼를 모조리 베었다.
콤바인의 작동원리를 설명하면 대략 이렇다. 먼저 기계 앞쪽에 뾰족하게 나온 정렬장치가 벼포기를 간추리면, 밑부분에 달린 커터(흔히 '바리깡'이라 불리는 이발기계처럼 좌우로 움직임)가 벼의 밑동을 자른다. 그와 동시에 순환운동을 하는 작은 막대들이 볏단을 나꿔채고, 곧장 컨베이어벨트 구실을 하는 체인으로 넘겨 콤바인 뒷쪽에 달린 탈곡장치쪽으로 운반한다. 볏단은 탈곡장치를 지나면서 낱알과 짚으로 분리된다. 낱알은 저장고에 쌓이거나 마대자루에 담기고, 볏짚은 바수거나 길쭉한 모양 그대로 논바닥에 깔린다. 그러니까 콤바인 한대가 벼베기와 탈곡을 동시에 수행하는 셈이다.
콤바인을 수리하느라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지, 수확작업 자체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콤바인 저장고에 모인 낱알은 다음작업을 위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기계에 따라서는 저장고가 따로 없고, 탈곡한 낱알을 곧장 마대자루에 담아야 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오늘 작업한 콤바인은 저장고를 갖춘 놈이다. 탈곡한 나락은 웬만큼 말려야 방아를 찧을 수 있다. 예전엔 가마니에 담아서 집으로 옮긴 다음 그걸 마당 같은 곳에 멍석을 깔고 널어 말렸다.
그런데 요즘은 나락 말리기도 꽤 간편해졌다. 콤바인이이 기계장치를 이용해 저장고에 담긴 나락을 트럭 짐칸에 묶어둔 이동장치로 옮긴다. 그 다음 아스팔트가 깔린 차도로 옮긴다. 아스팔트는 햇볕을 흡수해 복사열을 내뿜기 때문에 훨씬 빨리 마른다. 모기장처럼 생긴 건조포를 깔면 트럭이 그 위에 길다랗게 나락을 쏟아놓는다. 그걸 고무래를 써서 얇게 펼치고, 골을 타면 작업이 끝난다.
작업공정 하나하나가 너무 간편해졌다.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어리둥절 할 정도다.
세상이 편해진 것인가? 아니면 재미가 없어진 것인가.
그런데 이 모두가 실은 '화석연료'의 힘이라는 걸 새삼 떠오려보니 좀 입이 써진다.
하여 열흘 또는 보름의 세월을 단 반나절로 단축한 이 석유문명의 놀라운 세례가 에너지의 효율성, 인류의 미래라는 측면에서도 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곱씹어볼 일이다.
▲ 교회행사를 마치고 부리나케 달려온 운영 씨가 나락 너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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