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1. 1. 00:03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올해 벼농사, 그 피날레를 장식했다. 아울러 내년 농사의 첫삽이기도 했다.
우리가 짓는 논은 모두 여섯 군데로 나뉘어 있다. 수확작업이 콤바인 임자의 일정에 달려 있다 보니 지금까지 네 군데 논의 벼베기를 네 번에 나눠 했다. 그런데 한 달 넘게 논바닥 말리기에 매달렸지만 결국은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 네 군데 논 모두가 원래 물빠짐이 안 좋은 데다가 물빼기 작업을 너무 늦게 시작한 탓이 크다. 실상 수확기에는 논바닥이 바짝 말라 있어야 한다는 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질펀한 논에서 콤바인이 작업하는 안쓰런 광경을 보고야 왜 바닥을 말려야 하는지 절감할 수 있었다. 작업이 너무 힘들고, 기계에 무리가 가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콤바인 임자는 바닥이 너무 질다 싶으면 도중에 작업을 중단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점잖은 어른인데 지청구를 하신다. "아니, 논을 이 지경으로 해놓고 작업을 맡기면 어쩌라는 겨~"
핑계야 댈 수 있지만 그저 멋적은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조아릴 뿐. 이번보다 사정이 조금 나았던 두 번 째 벼베기 때도 이미 "우리 옆집이니까 해주는 거지, 이거 택도 없어~" 타박을 받은 바 있었다.
논바닥을 제대로 말리 못해 콤바인이 지나간 자리에 처참한 흑적이 남아 있다.
아무튼 그럭저럭 '난코스'의 작업은 모두 끝났고 남은 두 군데, 학교와 모정 앞 논은 원래 물빠짐이 좋은 곳이라 오래 전부터 이미 바짝 말라 있다. 언제든 콤바인이 들어서면 되도록 준비작업도 끝내 놓았다. 그런데 이 두 군데 작업을 맡은 이는 다른 분, 그러니까 우리 마을 이장이시다. 콤바인 임자들의 작업구역 또는 이른바 '나와바리'가 어떻게 정해지는 진 모르겠으나 그 또한 이 동네 나름의 질서이니 존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벼 수확은 그럭저럭 감이 잡혀 크게 걱정이 안 되는데 보름 쯤 전부터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바로 이모작으로 보리와 밀 농사를 짓는 문제.
사실 처음 해본 농사였고 그나마 작목은 오직 벼 하나여서 그 다음은 어찌해야 할 지 당췌 판단이 서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운영 씨한테 계속 빌붙는 것도 염치없는 짓이다. 물론 농사전망이나 일하는 기질에서 둘이 차이가 나는 점도 작용했다. 나는 벼를 중심으로 논농사를 유지하고픈 생각이 강한 반면 운영 씨는 축산(양계)과 밭농사를 병행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쌀이 워낙 헐값인 사정도 있고, 벼농사가 기질에 맞지 않는 점도 있는 듯 싶다. 해서 25마지기 가운데 10마지기는 운영 씨가 맡아 닭우리와 밭으로 전용하는 방법을 찾기로 했고, 나머지 15마지기는 내가 맡아 계속 논농사를 짓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올해 수확작업의 피날레르 장식하는 순간. 이장 님이 모정 앞 논의 마지막 남은 벼포기들을 수확하고 있다.
◀ 학교와 모정 앞에서 거둔 '마지막 나락'을 널어 말리는 작업을 끝낸 뒤.
이렇게 가닥이 잡히자 간단해졌다. 샘골 논 12마지기는 워낙 물빠짐이 좋지 않아 벼농사 말고는 다른 수가 없다. 물론 연을 비롯해 수생작물을 해볼 수 있고, 실제로 맨 아랫 배미 너 댓 마지기에는 그렇게 해볼까 생각 중이다. 그 밖에 어제 벼를 벤 학교와 모정 앞 논은 이모작을 너끈히 할 수 있다.
이 고장 사람들은 이모작 품목으로 보통 마늘이나 양파 농사를 짓는 편이다. 그것이 외려 쌀보다 낫다고 한다. 하지만 처음 심을 때와 수확할 때 품이 많이 드는 어려움이 있다. 그때 그때 필요한 일꾼을 사 쓰는 걸 여기서는 '놉 얻는다'고 하는데, 놉을 얻기도 갈수록 힘들다고 한다. 놉이라고 해봐야 '할머니' 소리 듣는 분들인데 나이가 들면 그나마 기력이 달리기 때문이리라. 나로서는 그나마 마늘·양파 농사는 비닐멀칭(이랑을 덮어 씌워 잡초를 억제하고 보온작용을 함)을 해야 한다니 그게 마뜩지가 않다.
이 경우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모작 품목은 보리나 밀이다. 물론 그 수익은 마늘과 양파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래도 이 나라 곡물자급률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는 점과 농법에 따라서는 땅심을 살릴 수 있다는 점이 맘에 들었다. 하지만 정부는 그러께부턴가 보리수매를 중단했고, 밀은 판로가 어찌 되는지 알 수도 없는 작물이다. 그래도 용기를 얻은 것은 지난번 얘기했던 한울생협에서 "잡곡은 공급이 달린다"고 한 점과, 영농조합 '린'이 자체생산하는 발효빵 원료를 지역에서 가꾼 밀로 하고 싶다는 의사를 나타낸 까닭이다.
문제는 파종 단계부터 제초에 이르기까지 재배기술에 대해 '까막눈'이라는 사실. 얼핏 알아본 바로는 관행 맥류재배법은 벼 수확 뒤 로터리(트랙터 따위로 흙을 잘게 바수는 일)를 치고 배수로를 낸 뒤 씨를 뿌리고 제초제와 화학비료를 준다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엄두가 안 나고, 더욱이 제초제와 화학비료라니...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있던 중에 '태평농법'이라는 걸 주워읽게 됐다. 요컨대 벼를 수확하면서 동시에 콤바인에 파종기를 달아 보리(밀) 씨앗을 뿌리고 그 위에 잘게 바순 볏집을 덮는다는 것. 그러면 피복한 볏짚이 햇빛을 가려 잡초의 생장을 막고, 나중에는 거름으로 쓰인다는 것. 당연히 제초제도, 비료도 쓸 일이 없는 친환경농법인 셈이다. 옳거니 무릎을 쳤지만 그것이 검증된 농법인지 눈으로 확인한 바도 없고, 주변에 그런
기계시스템도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다가 그 태평농법을 창안한 이영문 씨가 쓴 책 두 권(<모든 것은 흙속에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농사꾼이야기>)을 읽고, 그가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태평농.kr)도 검색했다. 말인 즉, 콤바인을 이용한 동시작업이 아니라도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벼가 서 있는 상태에서 보리(밀)씨를 흩어뿌린 다음, 콤바인으로 벼를 수확하면서 볏짚을 바숴 보리(밀) 씨앗을 덮으면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거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
마을 이장께 이 얘기를 하며 보리와 밀 종자를 구할 수 있느냐고 했더니 "미덥지 않은 구석은 있지만 말리지는 않을 테니 한 번 해보라"고 격려하며 종자를 구해주마 하신다. 종자를 구하지 못해 몇 일을 끙끙댔는데 갑자기 일이 쉽게 풀려버렸다. 두 논의 벼베기도 이장께서 하도록 돼 있으니 종자를 구하는 일과 자연스럽게 연계가 된 것도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비료살포기를 빌려 어제 아침 일찍 보리씨앗을, 점심 때에는 밀 씨앗을 두 곳 논에 뿌렸다. 그 직후 이장 님의 콤바인이 투입돼 벼수확은 한나절 만에 끝났다. 그것에 이어지는 공정인 나락말리기, 방금전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널어놓은 나락이 젖었지만 다행히 금새 그쳐서 나락이 떠내려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뭐, 이틀 쯤 더 말리면 되겠지.
딱하게도 인증샷을 찍어줄 사람이 없는 관계로 보리 씨를 뿌리고 난 직후 찍은 사진(왼쪽). 만약 누군가가 씨앗 뿌리는 장면을 찍어줬다면 오른쪽 사진과 같은 장면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벼를 베어낸 빈 논이 아니라 벼가 아직 서 있는 논두렁을 따라서 보리씨를 뿌리는 모습을.
어제 씨를 부린 보리와 밀은 곧 싹을 틔워 겨울을 나게 된다. 그리고 봄기운을 받아 자라고 이삭을 올려 여문 뒤, 나락 모내기를 하기 직전 수확을 하게 된다. 이 과정이 순조롭게 이어져 내년 늦봄에 보리와 밀을 실제로 수확할 수 있을지 기대반 걱정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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