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19. 21:03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시골에 산다
사실 이건 좀 설익은 얘기다. 갓난아이로 치면 칠삭둥이 쯤 되려나? 아무튼 지금 꺼내기에는 좀 시답잖은 그런 얘기가 되겠다. 그렇다고 이 얘기를 서둘러 꺼내야만 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어떨결에 그리 됐을 뿐이다.
뭔 대단한 얘기를 하려고 그리 사설이 길꼬... 그리 타박하지는 마시라. 제대로 여물지 못한 물건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아쉬움으로 헤아려주면 된다. 이 고장 사정에 밝지 못하고, 그렇다고 궁금한 걸 꼬치꼬치 캐묻는 성격도 못 돼 전체 판을 제대로 모르는데 설익은 얘기를 꺼냈다가 무슨 '사고'라도 칠까 두려운 점도 있다. 그러니 이야기 실마리를 풀기도 쉽지가 않다.
그러니까... 벼농사를 시작하면서부터 활동반경도 그만큼 넓어졌다. 지난 한 해는 밀린 숙제, 책 원고에 매달리느라 거의 두문불출이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도 벅찼다. 게다가 아이들 학교문제가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꼬이는 바람에 적잖이 속도 끓여야 했다. 그런 상태에서는 이곳저곳 기웃거리고 다닐 마음의 여유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올해 들어 벼농사를 시작하고 보니 사정이 달라졌다. 아무리 원고가 바빠도 얼굴을 내밀거나 일손을 보태야 하는 자리가 늘어났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성격이 다른 모임에 나가더라도 그 때마다 낯익은 얼굴을 거듭 마주치게 되더라는 거다. 농사인구, 그것도 중장년층이 크게 줄어든데다 친환경 생태농사꾼은 더욱 드문 실정이니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나야 생판 새내기 처지라 운영 씨나 벼농사로 엮인 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당혹스러웠던 것은 일관되게 친환경 생태농사를 짓는 사람이 그닥 많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예컨대 벼농사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안 쓰는 유기재배를 하는 데 다른 작물 또는 축산은 그렇지 않더라는 거다. 심지어 한 사람이 유기농 인증을 받은 논에서는 친환경, 그렇지 않은 논에서는 관행 농사를 짓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친환경 농사가 뭐냐?' 했을 때, 작목에 따라 또는 사람에 따라 그 기준이 제각각 인 게 사실이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더라도, 유기질비료(퇴비)를 사다 쓰는 건 진정한 유기농(공생농)이 아니라고 보는 천규석 선생같은 분이 있는가 하면, 농약이라도 제초제가 아닌 살충제를 적게 뿌리는 '저농약'까지 친환경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여기에다 화석연료를 쓰는 농기계와 농업용 비닐(시설채채소, 피복)도 친환경을 가르는 변수가 될 수 있다. 내 생각엔 적어도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을 때에야 '친환경'을 내세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농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렇듯 여러 질이니 생각이 비슷한 사람끼리 모둠을 짓는 건 인지상정이다. 그렇게 만난 사람이 주란 씨다. 이웃 동네인 밤실(원산) 마을로 가다가 오른쪽 산길로 접어들어 1킬로미터 남짓 들어가면 '숲속의 작은 흙집'이 나오는데 거기가 주란 씨네 사는 집이다. 그 곳에 자리 잡은 지, 그러니까 귀농한지 어느덧 10년을 넘었다. 휴대전화도 잘 터지지 않는 그 골짜기에서 노동운동 하는 남편과 딸, 이렇게 셋이서 소박한 삶을 꾸려왔다. 자기 밭 1천평, 그리고 언니네 밭 1천평, 이렇게 2천평을 혼자서 지어먹고 사는데 농약과 화학비료는 물론 비닐 멀칭도 하지 않는 농사를 짓고 있다.
실은 우리집이 이 곳에 처음 들어오면서 아는 이의 소개로 연결된 주란 씨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전화통화가 고작이었고, 주란 씨가 준 정보 또한 우리가 집을 구하는데 결정적 구실을 하지는 못했다. 그 뒤로는 함께 엮일 일도 없어 교통도 끊기게 됐다. 그런 주란 씨를 다시 만나게 된 건 역시 농사를 지으면서다.
일을 만들고, 마케팅과 연계해내는 데 뛰어난 감각을 지닌 운영 씨가 '친환경 농사꾼 네트워크'를 구상했다. 처음 생각은 이를 텐면 '친환경농산물 판매공동체'였는데, 여기에 주란 씨가 함께 한 것이다. 일단은 인터넷 카페를 개설해 각각의 농사소식을 알리고, 장기적으로는 이를 통해 농산물 판매통로를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이름 하여 '고산 행복한농장' http://cafe.naver.com/gshappyfarm. 그런데 주란 씨가 말하길 그렇게 만 하는 건 좀 거시기하니, 생태문제에 관한 공부도 함께 하면서 의미 있는 모임을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좀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딱히 반대할 명분도 없고, 나쁘지 않겠다 싶어 그렇게 하기로 뜻을 모았다. 판매할 농산물이 당장 없었던 상황이라 이 모임은 인터넷 카페말고는 그야말로 '공무모임'이 되었다.
<몬산토-죽음을 생산하는 기업>을 텍스트로 정해 발제-토론 방식으로 함께 공부하기로 했다. 세미나...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인가. 족히 20년은 되지 싶었다. 좀 낯간지럽기도 하고, 뭔가 싶기도 했지만 첫 모임을 해보니 꽤 괜찮은 자리였다. '학습'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때 그때 사회현안이나 농사일을 곁들여 토론을 하다보면 많은 걸 얻을 수 있었다. 두번째 모임에서는 우리 세 집 말고도 식구가 더 늘어 있었다. 그 새 주란 씨가 세 분을 더 끌어들였던 것이다. '동지'가 늘어나는 건 어쨌든 반가운 일이다. 얘기도 좀 더 다채로워 지고.
10월 18일 밤, 카페 '린'의 풍경. 오른쪽 빈 자리의 주인공은?
주란 씨의 바지런한 움직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엔 '생산자 모임'이었다. 이 고장에는 전북(전주)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한울'이라는 꽤 오래된 생협이 있다. 친환경 유기농산물을 다루는 데, 지금 물품을 내고 있거나 낸 적이 있는 사람, 앞으로 낼 뜻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현황을 설명하고 이후 계획을 의논하는 자리였다. 나? 나오라고 해서 나가봤더니 그런 자리였다.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난 아닌데..." 하며 물러나올 일도 아니다. 실제로 내가 '단작'하는 쌀은 논의대상이 아니었다. 그래도 '생태농업'이라는 가치를 공유한다는 이유, 그리고 앞으로 잡곡 농사를 지어볼까 '생각 중'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자리에 함께 할 자격이 주어졌다. 농사꾼들의 세계라는 게 이렇듯 허물이 없다. 결국 두 어 차례 만난 끝에 '한울생협 (고산면)생산자모임'이란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재미 있는 건 이 생산자모임 구성원이 '공부모임+@'라는 사실이다.
어제 저녁, 한 달에 한 번인 생산자모임이 열렸다. '린'이라는, 내가 알기로 고산면에 유일한 카페에서다. 이 카페의 사장(?) 또한 생산자모임 구성원이다. 발효빵을 생산하는데 그걸 한울생협에 납품하는 것이다. '린'은 카페 뿐 아니라 영농조합, 교육공동체의 이름이기도 하다. 발효빵의 원료로 이 고장 농산물을 쓰는 풀뿌리 자치, 입시교육·경쟁교육을 넘어 참다운 교육을 펼치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는 것이다. 고산고등학교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아담한 2층 건물 아래층, 테이블 서 너 개가 전부인 손바닥만한 공간은 아늑한 분위기였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진 탓에 몇 분이 빠졌지만 일단 모아놓으면 활기를 띤다. 특별한 주제도 없이, 두서도 없이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면서 얘기는 질서를 잡아간다.
"우리 공부모임하고, 린에서 하는 글쓰기모임하고 통하는 게 있을 거 같은데 함께할 수 없나?"
"그 전엔 '고산 행복한농장' 카페하고, '린' 카페하고 링크하는 게 어때요?"
"다른 데도 사이트 있으면 모조리 연계합시다"
"잘 나가는 곳에서 먼저 '인터넷 결재시스템' 구축하면, 다른 사이트도 연계해서 같이 활용하고 좋겠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기억나지 않는 더 많은 대화가 오갔다. 얘기에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기간이 훌쩍 지나 있다. 아쉽지만 일어설 시간. 하지만 무슨 결정사항이네, 결의사항이네 하는 것도 없고, 실행책임자도 정하지 않았다. 아마도 '연락책'인 주란 씨가 이리저리 연결해 뭔가를 만들어낼 것이다.
"근데, 오늘 얘기나온 거 정리해서 카페에 올려야 되는 거 아녜요?" 주란 씨가 날 쳐다보며 씨익 웃는다. "아, 사진도 좀 찍고..."
얼떨결에 '기자'로 임명되고 말았다. "이건 또 뭐여~" 툴툴 대면서도 휴대전화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는 나. 맨 앞에서 길게 늘어놓은 사설이 어찌 된 영문인지, 이제 이해가 되시는지. 나원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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