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13. 22:30ㆍ발길 머무는 땅/바람따라 구름따라
벌써 오래된 일이다. 그러니까 지난 2008년 봄, 백수가 되고 나서 훌쩍 길을 떠났지. 변산에서 시작해 서-남-동해안 도로를 끼고 도는 여행. 구름에 달 가듯, 딱히 마음 둔 곳 없이 발길 닿는 곳을 휘휘 둘러보는 여정. 시대가 바뀌었으니 말 대신 주'차'간산. 무슨 방랑벽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어느 순간, 다람쥐 쳇바퀴 돌듯 히멀건 도회지에 묶여 사는 삶이 스스로 불쌍해진 탓이다. 그래, 이렇게 코앞의 일에 매달려 아등바등 살다가 시나브로 스러지겠구나, 이래저래 인연이 닿은 사람이 사는 땅을 다 밟아보지도 못하고...
그리고는 열흘인가, 보름인가를 떠돌았다. 뭐, 로드무비를 찍자는 건 아니었고, 그저 산천을 눈에 넣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이어서 템포가 좀 빠른 편이었다. 일주일 사이에 3면의 해안을 훑고, 울진에서 내륙으로 꺾어졌으니 말이다. 그래도 훌쩍 떠난다는 것, 터덜터덜 가다가 불현듯 끌리는 곳으로 향하는 무목여행의 묘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생각만 있었을 뿐 냉큼 실행하지를 못했는데, 어제 참으로 오랜만에 훌쩍 떠날 기회를 얻었다. 그 전날 페이스북을 훑어가다가 보니 뭔가가 눈에 확 들어온다. '날이 춥다보니 자리가 좀 남았네요. 불현듯 훌쩍 떠나는 여행이 재밌습니다. 순천만, 같이 가실 분 있나요?' 완주문화원 이 국장이 올린 포스트다. 가지! 안 갈 이유가 있나! 그런데 생각해보니 못갈 이유가, 오전에 선약이 하나 있다. 어쩌나 잠시 고민하다가 어렵게 전화를 했더니 고맙게도 바로 약속날짜를 바꿔주었다.
오전 9시. 큰 아이 손목을 잡고 문화원에 도착했더니 전세버스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우리동네 살면서 문화원에 근무하는 채송화 씨가 반겨주고, 이 국장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버스는 봉동과 용인을 지나면서 손님을 더 실었고, 모두 서른 명 남짓이 '순천만 생태답사'의 일행이 되었다. 한 시간 쯤 고속도로를 달려 우리는 남원 혼불문학관에 이르렀다. 대하소설 <혼불>을 쓴 최명희를 기리는 곳이다. 차창 밖으로 두텁게 쌓인 눈을 이고 있는 소나무 숲이 장관이더니, 문학관 잔디마당에도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어 운치를 더한다. 십 수년 전 여름휴가 때, 식구들하고 일정이 좀 어긋나 머뭇거리다가 <혼불>을 집어 들었는데 그해 여름휴가를 홀라당 바쳐버리고 말았던 기억. 이제는 인상적이던 몇 가지 에피소드만 아련히 남아 있지만, 해설사의 설명이 기억을 조금은 되살려준다. 지인들이 '성보암'이라 불렀다는 집필실을 재현해 놓았는데, 어쩐지 짠해 보인다. 같이 간 딸 아이는 낙서판 식으로 된 방명록에 자기도 커서 작가가 되겠노라고 썼다. 마당으로 나오니 저 멀리 '거멍굴' 쪽이 내려다보인다.
어차피 들러가는 곳이니 오래 머물 순 없겠지. 버스는 다시 길을 떠났고, 고속도로와 국도를 번갈아 타고 달린다. 구례로 접어들면서는 왼쪽으로 웅장한 산줄기가 이어진다. 지리산이다. 이제는 헤진 집신처럼 퇴락할 대로 퇴락해버린 '시인'이 한때 '나는 저 산만 보면 피가 끓는다'고 읊었던 그 산. 산정이 길게 누워있는 곳이 삼성재라고 누군가 일러준다. 버스는 머잖아 순천만에 도착했다. 정오가 지난 시각, 주차장 근처 차도를 따라 꼬막요리를 파는 식당이 줄을 서 있다. 예약이 된 듯한 식당 안으로 들어서니 곧이어 음식이 나온다. 꼬막정식이란다. 회묻힘, 탕, 양념꼬막, 통꼬막, 꼬막전에 꼬막탕수까지, '정식'이란 이름이 붙을 만하다. 누군가는 꼬막맛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도 벌교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꼬막무침을 맛갈스럽게 묘사했던데 솔직히 그 맛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점심을 맛있게 먹고 나서 우리는 순천만 생태공원으로 '입장'해 해설사의 안내를 듣고 저마다 순천만을 한 눈에 굽어볼 수 있다는 용산전망대를 향해 길을 나섰다. 예정된 귀가시간 탓에 배정된 시간이 빠듯하다.
나무로 장식된 큰 다리를 건너니 드넓은 갈대숲이 나타난다.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에 나오는 금강 하류 신성리 갈대밭을 지나친 적이 있는데 그곳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아스라히 벋어 있다. 숲 사이로 사람들이 나다닐 수 있도록 나무판자로 통로를 만들어놨다. 갈대는 뭍에서 보던 것보다 키가 훨씬 크다. 갈대꽃도 더 크고, 소담스럽다. 바람이 불면 눈송이처럼 꽃가루가 날렸다. 비록 겨울이라지만 한낮의 햇빛을 받은 갈대꽃이 반짝인다. 3킬로 남짓 걸었을까, 갈대밭이 끝나고 산허리로 접어든다. 이 곳이 용산인 듯 하다. 한참 걸어서 그런지 송글송글 땀이 맺힌다. 등산하는 기분으로 20분 남짓 오르니 용산전망대거 눈앞을 가로 막는다. 바다보다도 동글동글한 모양의 갈대밭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시각은 3시를 지나고 있고, 햇빛은 훤하게 수천만에 내리쬐고 있다. 휴대폰 디카를 들이대니 정면 역광이다. 그 이름난 '노을이 물든 순천만'을 볼 수 없어 아쉽다. 그나마 버스까지 되돌아갈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았으니 진드감치 갯벌을 둘러볼 여유도 없다. 산을 내려오는데 아쉬운 마음에 자꾸만 곁눈질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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