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12. 17:34ㆍ발길 머무는 땅/바람따라 구름따라
온종일 변산에서 노닐다 돌아왔다. 지난 2월말에도 다녀왔으니 두 달 새 두 번째다. 저번에는 바닷물 떠오는 게 주목적이라 격포항 방파제에서 콧구멍에 바닷바람 들인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름부터가 ‘봄나들이’였다. 우리 ‘친환경 고추작목반’이 벼르고 별러 떠난 길이다.
"쭈꾸미 먹으로 가자!"
외변산과 내변산을 두루 훑었다. 아침 10시에 길을 나서 변산반도에 다다르니 점심은 아직 이른 시간. 차를 세우고 철 이른 백사장을 거닐었다. 함께 떠난 중장년 여인네들이 소녀시대로 되돌아간다. ‘영화 찍는 장면’이 연출되지는 않았지만, 얘깃거리가 갑자기 풋풋해졌다.
격포항으로 자리를 옮겨 점심을 들었다. 애초 “쭈꾸미 먹으로 가자!”고 나선 길이니 주 메뉴는 제철 맞은 쭈구미정식이다. 숙회와 찜, 산낙지회를 닮은 쭈꾸미회, 그리고 볶음이 나왔다. 다들 탄성을 내지른다. 점심을 끝내고는 바로 옆 수산시장에 들렀다. 일행 중 두 사람이 생물 쭈꾸미를 샀다. 올해는 쭈꾸미가 잘 잡히지 않아 값이 꽤 비싸단다.
해변도로를 20분 쯤 달려 내소사에 이르렀다. 들머리 전나무 숲길은 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경내에는 봄빛이 그득하다. 흰 목련과 꽃복숭아(홍도화), 벚꽃이 어우러진 ‘빛잔치’가 어지럽다. 그것도 잠깐, 머잖아 이 또한 스러질 거라 생각하니 못내 쓸쓸해진다.
화요일에 찾아온 이 화려한 봄날이 저물고 있다. 시골로 내려온 지 올해로 3년째, 요일감각이 시나브로 흐릿해진다. 농작물이 인간세계의 평일-휴일을 감안해 지들 ‘스케줄’을 맞출 리가 없다. 농사꾼이 작물에 맞춰 일정표를 짤 수밖에. 같은 농사를 지으니 화요일이라 해서 봄나들이를 못할 까닭이 없었다. 봄날 풍경을 패이스북에 올리다 문득 오늘이 평일임을 깨닫고 하는 얘기다. 그나마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있어 주말을 알아차린다.
봄나들이는 고추작목반과 함께 했지만 내 주력작목은 벼농사. 올해로 2년째다. 지난해는 운영 씨하고 둘이서 스물 닷 마지기(5천평)를 지었는데, 올해는 나 혼자서 서른 마지기(6천평) 쯤 된다. 물론 내 땅은 한 뼘도 없고 다 빌린 것이다. 아파트 평수에 견주면 입이 딱 벌어질 넓이지만 벼농사 치고 그리 큰 규모가 아니다. 적어도 백 마지기(2만평)는 지어야 ‘대농’ 축에 든다. 서른 마지기 벼농사 수입이라고 해봐야 한 해 몇 백만원이나 될까. 그래도 벼농사를, 더욱이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친환경 재배’를 고집하고 있다. 무엇보다 생태라는 ‘가치’를 떼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탈주' 이야기
돌이켜보니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을 하며 반평생을 살았다.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군사독재에 저항해야 했다. 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사회운동가로 살아야 했다.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만으로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인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으로 이어지는 스무 해를 앞만 보고 달려왔다. 주로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에 이르는 ‘격동시대’ 노동자의 현실과 투쟁을 기록하는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우리 안의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고 말았다. 이 작은 지면에 그 사연을 어찌 다 담아낼 수 있으랴.
아무튼 그렇게 넘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뒤를 돌아보고, 옆도 둘러보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내 활동의 가치가 적잖이 허상이었음을 깨달았을 때의 그 자괴감이라니... 노동운동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거기를 떠나 여기로 왔다.
생태가치나 농사의 공익기능에 처음부터 끌린 건 아니었다. 20년이면 할 만큼 했으니 이젠 신선이나 되어볼까? 하는 생각. 그 때 나를 싸고돌았던 화두는 온통 자발적 가난, 작고 가벼운 삶, 안빈낙도, 은거 따위였다. 그게 다였으면 아마 지금쯤 ‘도인’이 되어 있겠지. 허나 식솔이 딸린 몸으로 차마 그럴 순 없는 노릇이고. 그래도 아이들을 끔찍한 도시문명 속에 팽개쳐 둘 순 없는 일 아닌가. 밥벌이와 살림살이 따위는 덮어둔 채, 아이들 학교를 푯대 삼아 무턱대고 내려왔다. 일단 내려가고 보자!
맞다, 그것은 대책 없는 탈주였다. 좀 무모했을망정 ‘시골살이’란 것도 알고 보면 ‘도시살이’에 대한 부정 아니겠나. 도시를 떠나 시골로 내려온 사연을 들어보면 대체로 그게 그거다. 노동운동 하다가 귀농했다 하여 여기저기 지면을 떼어주고 있지만, 내가 처음도 아니고 그리 중뿔날 것도 없다. 더욱이 시골살이 2년을 갓 넘긴 사람이 ‘귀농의 이론과 실제’ 따위를 들먹이는 것도 남사스런 짓이고. 그렇지만 나는 이 서툴고 감질나는 얘기를 꾸역꾸역 새겨나가고 있다. 왜냐! 아무렴 반면교사 노릇쯤은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장년에 접어든 이들에게 묻건대, 언제까지 도시에서 살 수 있을까? 설령 살 수 있다 한들 그게 행복할까? 적잖은 사람이 ‘인생 이모작’을 고민할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나 같은 사람의 삶도 쓸 만한 선택지가 될 수 있지 싶다. 실제로 적지 않은 벗들이 우리집에 들러 시골살이를 탐문했고, 탐문하고 싶어 한다. 하여 언제부턴가 시골살이를 꿈꾸는 이들에게 ‘괜찮은 롤 모델’이 되어야겠다는 사명감까지 생겼다. 그러나 ‘생태’ 말고는 그 어떤 당위적 가치도 디밀지 않는다. 굳이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애써 내 방식을 권하지도 않는다.
아무튼 한 해 동안 여기저기 기웃거린 끝에 ‘생태농사’를 지으며 살기로 했다. 지난해는 벼농사 하나에만 매달렸다. 그루갈이(이모작)로 보리와 밀을 심었지만 작황이 그리 좋지 않다. 올해부터는 채소농사도 지을 생각으로 우선 고추재배를 시작했다. 이 또한 처음이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작목반을 꾸렸고, 지금은 샘골 운영 씨네 비닐하우스에서 고추모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고추모 상태가 시원치 않았다면 오늘 봄나들이도 가당치 않았을 게다. 5월초에는 고추모를 본밭에 아주 옮겨 심게 된다. 머잖아 벼농사도 시작된다. 이달 하순에는 씻나락을 담가 못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동네 막걸리 잔치
막상 농사철이 코앞에 다가오니 솔직히 좀 긴장이 된다. 눈부신 봄날 나들이를 다녀오고, 비 온다는 핑계로 부침개에 막걸리 잔 기울일 때는 좋았는데 말이다. 막걸리는 또 뭐냐고? 보통 이런 식이다. 지난 토요일,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두 시나 되었을까, 가릅재 찬민이 아빠 목소리가 빗줄기를 타고 울린다.
"형님! 날씨도 끄물끄물한데 건너오세요. 부침개에 한 잔 하게요!"
이게 웬 떡이냐 싶어 곧장 보던 책을 덮는다.
"막걸리 몇 명 사들고 바로 건너가지요"
그렇게 시작된 자리가 삽시간에 '동네잔치'로 커졌다. 다른 동네에서까지 ‘원정’을 왔다. 게 중에 농사꾼은 보이지 않고, 직업군은 다양했다. 대부분이 이 동네에 ‘귀촌’한지 몇 해가 된 이들이다. 하지만 같은 초‧중학교 학부모라는 끈이 그 자리를 만들어줬다. 언뜻 전통적 농촌공동체가 이런 유형의 새로운 시골공동체로 세대교체 되어가지 싶다. 도시와 시골을 가르는 주요지표 중 하나가 바로 이 공동체이기에 하는 얘기다.
요즘 도시고, 시골이고 변덕스런 날씨 때문에 애를 먹고 있다. ‘춘래불사춘’이 뭇사람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운영 씨도 수입 좀 늘리겠다며 옥수수를 일찍 옮겨 심었다가 요 며칠 된서리를 맞아 냉해를 입었다고 푸념이다. 되살리기가 쉽지 않다니 참 슬픈 얘기다. 그래도 진짜 봄은 곧 올 것이고, 이 들녘은 머잖아 푸른 물결이 넘실댈 것이다. 작은책 (201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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