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10. 18:21ㆍ발길 머무는 땅/바람따라 구름따라
날씨가 미치지 않고서야... 오랜 장마가 끝났나 했더니 이젠 불볕더위다. 어제에 이어 수은주는 37도 선을 우습게 넘겼다. 울산에서는 40도로 역대 최고기온 기록을 갈아치웠다는 소식이다. ‘삼복더위’ 같이 귀에 익은 말로는 당최 설명이 안 되는 현상이다. ‘지구온난화’니, ‘기후변화’니 하는 낯선 용어를 끌어대야 겨우 사태가 파악된다.
요컨대 이 미친 날씨가 앞으로 우리나라에 붙박일 거란 얘기 아닌가. 한낮에만 그런 게 아니다. 밤이 되면 ‘열대야’가 찾아온다. 가만히 있어도 비질비질 땀이 흐르니, 도시에서는 에어컨 아니고는 견뎌낼 재간이 없다. 시골이라면? 헐렁한 차림으로 집을 나서면 그래도 숨통이 트인다. 여기에 그럴싸한 구경거리라도 생기면 더 없이 좋다.
그저 상상이 아니고 실제 벌어진 일이다. 그러니까 지난 8월2일 밤, 원촌마을 장터에서 열린 ‘제2회 백운가설극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완주 땅에서 농사짓고 사는 사람이 영화 한 편 보자고 백리 길을 찾았다면 뻔한 거짓말이고. 실은 ‘작은도서관 여름방학 캠프’에 우리 둘째 아이를 ‘모시고’ 온 길이었다. 마침 진안군 마을축제가 겹쳤고, 첫째날 밤 캠프 프로그램도 가설극장 관람이었던 것이다.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아이 덕분에 정말 오랜 만에 가설극장 풍경을 만났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추억 돋는다’다던가.
내 어릴 적에도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영화를 틀었다. 인근 군부대에서 ‘대민봉사’ 차원에서 보여줬던 것 같다. 축구 골대에 광목으로 영사막을 설치하고 영사기를 돌렸다. 워낙 어릴 때 일이라 영화제목도 기억나지 않지만 ‘계몽영화’나 ‘문화영화’가 아닌 일반 극영화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반라의 여배우가 고양이를 연신 쓰다듬던 장면. 그걸 보고 “야, 육체 조옷타!” 탄성을 지르던 어떤 아저씨. ‘19금’ 장면이라도 나오면 영사기를 돌리던 기사가 두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고, 여기저기 터져 나오던 남정네들의 볼멘소리. 시골의 한여름 밤을 후끈하게 달궈놓던 그 가설극장의 추억 말이다.
그런데 그게 이젠 40년도 훨씬 넘은 옛날 얘기다. 세월도 세월이지만 문명도 몰라보게 변했다. 촤르르~ 필름 소리 요란하던 아날로그 영사기 대신 날렵한 노트북 컴퓨터와 빔 프로젝트가 자리를 잡았다. 옛날 영화포스터 수 십장을 인쇄해서 걸어두긴 했지만 그걸 추억하는 분위기는 아닌 듯했다. 입구에 ‘제2회 백운가설극장’ 문구를 넣은 배경그림을 설치해 기념촬영과 사진인화 서비스도 제공했지만, 그 자체가 추억하고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이날 틀어준 영화도 ‘최근작’이라 할 수 있는 <7번방의 선물>이었다. 그럼, 다들 처음 본 영화냐면 그렇지도 않다. 지나는 아이들 몇을 붙들고 물어보니 대부분 이미 한 두 번은 본 영화라 했다. 어르신들이야 처음 보는 분들이 많았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아무튼 몰입도 높은 영화였던 탓에 분위기가 산만하진 않았던 것 같다. 흠이라면 상영 도중 한 차례 컴퓨터가 다운되는 바람에 한 동안 상영이 중단 된 사태. 옛날 같았으면 여기저기서 휘파람 불고, 난리가 났을 텐데, 다들 얌전히 기다려준 것도 뜻밖이었다.
그래도 역시나 시골이요, 가설극장이었다. 플라스틱 간이의자로 마련한 관람석 뒤쪽에는 걸쭉한 막걸리 판을 벌여 놓았던 것이다. 양동이에 막걸리를 쏟아놓고, 어죽과 김치, 삶은 감자와 고구마를 안주로 내놨다. 밭일을 끝내고 온 길이거나 밤마실 나온 듯 한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술잔을 기울이며 땀내 나는 얘기를 주고받는다.
그래, 가설극장을 그저 ‘추억거리’로만 볼 일은 아닌 것 같다. 2013년, 2014년... 오늘의 백운 사람들에게 어떤 한여름 밤을 베풀 지 좀 더 궁리해봤으면 싶은 것이다. 월간 <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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