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모 이사하던 날

2013. 3. 6. 00:16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이사'라는 말에서 당신은 어떤 기억이 떠오르는가. '대표이사' 말고 '포장이사'의 이사에서 말이다. 전세금이나 임대보증금을 올려주지 못해 더 작은 집으로, 더 외진 곳으로 짐을 싸야 했던 서러움을 떠올리는 이도 있겠지. 하지만 갈수록 더 넓은 평수로, 더 큰 집으로 옮기는 게 보통이다. 처음 살림을 차릴 때는 단칸방(요즘은 '원룸'이라고 하더라만)이나 작은 집에서 시작하더라도 차츰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 아이가 생겨도 처음엔 그리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세살 네살, 아홉살 열살... 커갈 수록 사정은 달라진다. 단칸방(원룸)으로 버티기 힘든 상황이 닥치게 된다. 더 큰 보금자리로 이사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게 어디 사람세상만의 얘기던가. 식물도 이사를 간다는 사실! 처음에야 싹을 틔우는 게 중요하고, 다닥다닥 붙어 고개를 내민다 한 들 문제될 게 없다. 그런데 싹을 내민 것들마다 몸집이 불어나면 사정은 사람세상과 다를 바 없다. 더 큰 공간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

 

어제였다. 고추모들의 이사, 다시 말해 고추모를 옮겨심은 날. 그런데 어제부터 오늘까지, 생각지 못했던 일이 생기는 바람에 이제서야 '고추모 이사' 얘기를 쓴다. 이번주 월요일에 고추모를 옮겨심는 건 벌써 예정됐던 일이다. 아침 10시쯤 도착하니 비닐하우스 안은 이미 밭갈이를 마친 상태였다. 운영 씨가 지난주에 관리기를 빌려 혼자서 로터리를 친 것이다. 미안스럽고도 고만운 일이다.

 

고추모가 자라는 온상의 비닐을 걷어 올리니 그새 부쩍 자라서 이제는 본잎이 떡잎보다 더 눈에 띈다. 일주일 전까지의 모종상태와 견줘 그 차이가 확연하다. 그새 날씨가 많이 풀렸고, 기온이 많이 오른 덕일 게다. 좁은 땅에서 고추모의 덩치가 커지면 더 넓은 땅으로 옮겨심는 건 당연하다. 고추모가 뿌리내닐 자리를 지금보다 열 배 쯤 넓혀주는 일. 그것이 어제 우리가 한 일이다.

 

고추모들한테 열 배 쯤 넓은 터전을 마련해주는 건 바닥을 판판하게 고르고 그 위에 뿌리내릴 토양을 갖춰 옮겨심는 것이다. 우선 쇠스랑으로 바닥 흙을 고른다. 그런데 지난해 멀칭을 했던 비닐조각이 널려 있다. 본격적으로 땅을 고르기에 앞서 이 놈들을 그러모아 없애야 한다. 짜증하는 일이다. 비닐조작을 대충 걷어내고, 쇠스랑으로 땅을 고른 뒤 맨손으로 가지런히 다듬는다. 그 위에 상토를 깔고 고추모를 옮겨심는 것이 오늘의 작업내용. 사실, 이는 새롭게 시도하는 방식이다. 모판에서 본잎 두 장이 나올 때까지 키운 뒤에는 벌집 모양의 육종포트에 옮겨심는 게 보통이다(오른쪽 사진 참조). 그런데 이번에 고추모를 좀더 강하게 기르기 위해 포트가 아닌 본밭에 옮겨심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사단이 벌어졌다. 운영 씨가 새로운 기법을 도입한 것. 맨땅 위에 고추모를 옮겨심는 게 아니라 판판하게 고른 땅 위에 부직포를 덮고 그 위에 다시 상토를 깔아 고추모를 옮겨 심자는 것이었다. 그리 하면 잡초를 '원천봉쇄' 할 수 있다고. 그럴 듯 하니 나머지 사람들은 묵묵히 지침에 따라 땅바닥을 고르고, 부직포를 깔고, 그 위에 상토를 덮었다. 그리고는 고추모를 옮겨심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라? 상토가 엷은 탓인지 아무리 해도 고추모가 꼿꼿이 서지 못한다. 너도나도 이건 좀 문제가 있다고 따지는데 운영 씨는 "안 그럼, 풀을 어찌 잡을 건데?"라며 요지부동이다. 이 때 김 장로가 들어섰다.

 

"부직포를 밑에 깔면 고추모가 곧게 서기도 힘들고, 뿌리를 제대로 벋기 힘든데..."

 

그것으로 상황은 결판이 났다. 농사경력 30년 배테랑의 얘긴데 아무리 입김이 센 운영 씨라도 물러설 수밖에. 기껏 옮겨심은 고추모를 다시 뽑아내고, 부직포 위에 얹었던 상토를 맨땅에 엎어 부직포를 빼내고... 

 

 

 

한바탕 법썩을 떤 뒤 그제서야  '유효한' 옮겨심기가 다시 시작됐다. 역시, 여인네들의 손이 빠른다. 하지만 계속 쭈그리고 앉아 손을 놀리자면 발목관절과 무릎관절이 시큰하고 뻐근해진다. 기운만 쓸 줄 아는 남정네들은 친환경 상토와 퇴비 포대를 져다가 섞는 작업을 맡았다. 상토를 혼합하는 기계가 멀쩡하게 서 있었지만 전기장치가 고장나 작동되지 않으니 삽과 맨손으로 뒤적거려 섞을 수밖에. 적당히 섞여졌다 싶으면 그걸 떼매다가 맨바닥에 깔아준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작업이 오후 5시가 넘어 끝났다. 10배쯤 넓은 땅으로 이사한 고추모에게는 흠씬 물을 준 뒤 비닐터널이 씌우고, 거적을 덮었다. 한 사나흘 그렇게 뿌리를 내리고 나면 앞으로 두 달 동안 고추모는 몸집을 키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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