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 오후의 풍경

2013. 4. 7. 21:39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시골에 산다

간밤엔 너무 세게 달렸나 보다. 메스껍고 골이 아파 당최 잠을 이룰 수 없으니, 이젠 나이 좀 생각하라는 신호같다. 해서 늦으막히 몸을 일으켰는데, 그나마 밭갈이가 걱정돼 무리를 했다. 오늘 주란 씨네 옥수수밭 로타리를 쳐주기로 했던 까닭이다. 처음엔 어제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루 늦췄다. 마침 일요일이라 농업기술센터가 문을 열지 않고, 관리기도 빌릴 수 없으나 주란 씨가 동네사람한테서 구해보기로 했다. 부시시 일어나 전화기를 확인했는데, 뜻밖에 연락이 왔던 흔적이 없다. 이상하다. 주란 씨 성미를 감안컨대 '부재중 전화' 표시가 몇 번은 있어야 할 텐데...

 

바로 통화 단추를 누른다. 어렵쇼? 전화기가 꺼져 있단다. 이번엔 집전화. 한참을 기다려도 수화기를 들 낌새가 없다. 무슨 일이지? 갑자기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휙휙 스치고 지나간다. 에이 설마... 불길한 상상이 떠오를 때마다 도리질을 친다. 그 뒤로도 1시간 간격으로 통화버튼을 눌렀지만 상황은 그대로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문 밖을 나서니 날씨가 화창하다. 어제는 하루종일 비가 내렸지. 그 빗줄기를 타고 걸려온 길 건거 가릅재 찬민이 아빠 전화.

"형님! 날씨도 끄물끄물한데 건너오세요. 부침개에다 한 잔 하게요"

그렇지. 이런 때도 있어야지. 난데없이 자극을 받은 군침샘이 흥건해진다. 보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려요. 막걸리 몇 명 사들고 언능 건너갈게요"  

그렇게 시작된 자리가 '동네잔치'로 변해서 왁짜지껄, 흥청망청 화려하게 피날레를 장식했었다.

 

아무튼 시원찮게 생겨먹은 뒤곁 살구나무는 빗줄기를 머금어선지 피어난 꽃이 싱그럽다. 어디 벚꽃 흐드러진 곳으로 훌쩍 떠나버려? 그랬다가 나중에 주란 씨가 밭갈이를 하자고 연락을 해오면 낭패 아닌가. 알 게 뭐야 우리일도 아닌데... 아니지? 그래도... 엎치락뒤치락 생각이 엉키는 사이 오후가 지나고 있었다.

 

 

우선 주변의 봄기운부터 만나보기로 했다. 자전거에 올라  보리밭을 향했다.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보리는 여전히 풍신나게 생겼다. 보리 숱은 대체로 듬성듬성, 무성하게 자란 곳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보리알을 거둘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적당히 자라면 뒤엎어서 녹비로나 쓸까... 어쨌든 더 두고 볼 일이다.

 

이번엔 밀밭. 그래도 보리밭보다는 사정이 낫다. 보리에 견줘 숱이 가지런 하고, 생육상태도 나아 보인다. 수확하는데는 별 문제가 없어보이는데, 어차피 '얼치기'의 눈이니 결과는 더 두고 봐야 할 게다.

 

집으로 돌아오는 마음이 좀 착잡하다. 돌아와 집안을 서성이고 있는데 애들 엄마가 쪽지를 하나 건넨다.

"장 좀 봐오셔!"

노란색 메모지에는 '양파, 감자, 오렌지'가 적혀 있다.

"아참, 아이스크림도 좀 몇 개 사오고..."

노트북 PC에 찰싹 매달려 있던 둘째 아이를 닦아세워 다시 자전거에 오른다. 강변길을 따라 20분 남짓 달리면 읍내 마트에 다다른다. 보통은 승용차를 끌고 가는데, 오늘은 봄날씨를 느껴보자는 생각이었다. 강변길에 다다르자  공기가 차갑다. 따라 나선 아이가 너무 춥다며 승용차로 가자고 징징댄다.

"예까지 와서 다시 돌아가는 건 좀 억울하잖아? 그냥 가자!"

 

 

짙푸른 강물에 바람이 불어 끝없는 물결을 만들어내고 있다. 바닷가의 그것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귀를 기울이면 찰싹찰싹 소리가 날 듯도 하다. 물결이 다다르는 가장자리엔 말라비틀어진 갈꽃, 부들 대가 까칠하게 서 있다. 다행히 파란 새 순이 돋아나고 있다. 부들도 갈대도 그렇고, 꽃창포도 새순을 올리고 있다. 바로 옆 갯버들에도 물이 올라 새 순을 띄우고 있다. 머잖아 '버들강아지'로 자랄 놈들이다.

 

저만치 뚝방길 가에 피어있는 매화, 개나리, 목련 따위 봄꽃의 옅은 색깔과 견줘 한결 싱싱한 기운을 벋고 있다. 봄은 이렇게 성큼 익어가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