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완주 통합을 원치 않는 까닭

2013. 5. 9. 06:09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시골에 산다

'전주-완주 통합반대 군민결의대회'에 다녀오는 길이다. 모인 사람이 얼추 3천명 쯤 돼 보였다. 군단위 집회 치고 꽤 많은 사람이 모인 것 같다. 옥외에 의자를 늘어놓고 실내체육관에서 열리는 집회를 중계할 만큼. 

 

완주로 이사와 살면서 정치집회에 참가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사실, 내가 알기론 대규모 정치집회 자체가 2~3년만에 처음이다. 해서, 참가자 대부분이 60~70대 농민인 시골의 정치집회는 어떤지 궁금하기도 했다. '농민대회'나 '민중대회'라는 이름으로 서울에서 열린 농민집회를 몇 번 경험한 적 있기는 하다. 백발에 주름 깊게 패인 어르신들이 그 먼 길을 어찌 올라오는지 들은 바가 있긴 해도, 같은 처지가 되어 '동행'하기는 처음인지라 조금 흥분되기까지 했다.

 

 

주최측(통합반대대책위)이 대절한 관광버스가 10킬로 남짓 떨어진 집회장까지 주민들을 실어날랐다. 내가 살고 있는 면은 반대여론이 워낙 강해서 마을 이장들이 집회참가를 독려했다. 나한테도 이장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집회가 열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못자리 물도 봐야 하고, 내일 옮겨심을 고추모에 물도 주어야 해서 참가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장님의 전화를 받고 보니 갈등이 일고, 결국 참가하는 걸로 생각이 바뀌었다.

 

물론 그냥 시골에서는 집회를 어찌 진행하는지 구경하러 간 건 아니고, '통합반대'에 뜻을 같이해서다. 내가 여기로 이사온 직후 통합문제가 물위로 떠올랐다. 처음 들었던 생각은 "조용히 살아보려 했더니만... 이 놈의 세상 어딜 가나 사람을 가만 두지 않는구나" 였다. 주변의 분위기도 반대하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두어 달 전에는 대책위 관계자한테서 홍보위원회 활동을 제의 받기도 했다. 하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그럴 처지가 아니어서다. 상황을 잘 모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정치행위 자체가 부담스러웠던 탓이다. 그래도 통합에 대해 뚜렷한 견해를 지닌 처지에서 집회참석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집회장 들머리에는 이미 한 농민단체가 수육과 김치를 곁들인 막걸리 판을 벌여 놓았고, 영업하는 포장마차도 꽤 눈에 띄었다. 시작시간이 저녁(7시)임을 감안한 듯 백설기와 생수, 요구르트, 바나나를 담은 비닐봉지를 나눠준다. 결연함보다는 잔치판 같은 흥겨움으로 집회장의 분위기는 들떠 있었다. 사전행사로 한 시골마을 장년-노년 여성예술단이 펼치는 난타 공연이 흥을 한껏 돋웠다. 이윽고 시작된 대책위 출범식과 결의대회는 여느 집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회사에 이어 여러 부문을 대표한 이들의 연설이 이어졌다.

 

"현직 도지사-전주시장-임실군수의 정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군민의 이해와 의사를 무시한 꼼수통합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이른바 21개항의 전주-완주 상생발전방안은 빛 좋은 개살구로 실현가능성이 전무한 사기극이다. 절대 속지 말자!"

"지금까지 다른 지역 41 곳이 통합되었지만 그 가운데 통합당시의 합의사항이 지켜진 곳이 하나도 없다. 일방적 흡수통합이다!"

"우리 군민이 지난 수십 년 애쓴 결과 이제는 군단위 지역으로는 살만한 곳이 되었는데, 통합이 되면 도시주민 위주의 행정으로 농촌지역은 희생양이 될 뿐이다!"

 

 

이에 따라 대책위는 6월말로 예상되는 주민투표에 적극 참여해 반대표를 찍는다는 행동지침을 발표했다. 처음엔 투표거부 전술이 유력하게 거론됐지만 어차피 반대여론이 우세하니 이번 기회에 아예 결판을 내버리자는 의지가 작용했다고 한다. 아울러 사전투표제가 도입되고, '관권선거' 조짐이 나타나면서 투표거부가 바라지 않는 결과를 부를지 모를다는 우려도 있었던 모양이다.

 

한편 통합을 추진하는 쪽의 반론도 만만치가 않다. 거기서도 '반대진영 주도세력의 정치적 목적과 기득권 지키기'를 들먹인다. '전주'라는 브랜드를 통해 기업유치, 일자리 창출 같은 기회가 더 쉬워진다고 한다. 하여 장군멍군식의 논란이 이어지는 양상이다. 그러고 보면 양쪽의 주장에는 저마다 일리가 있는 게 사실이고, 아울러 양쪽 다 근거를 확인하기 힘든 억측도 있는 거 같다. 게다가 '정치인'들이 상황을 이끌어가고 있다. 완주군수는 '군민의 의지에 따르겠다'는 공식태도와 달리 통합을 강력히 추진하는 게 분명해 보인다. 반면 군의원 다수는 통합반대특위를 구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정치적 목적이 개입되지 않을 수 있겠나. 문제는 그 정치행위에 이른바 '진정성'과  일관성이 있느냐다. 아울러 정치인들에게 정치적 행보를 하지마라 할 순 없지만 어디까지 대중의 요구와 조화를 이뤄야 마땅하다. 

 

이에 비춰 완주군수의 통합추진은 정치적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실 4년 전에도 통합논의가 불거졌다. 그 때는 현 군수가 반대진영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결국 통합이 좌절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작 4년 만에, 딱히 여건이 바뀐 것도 아닌데 군수의 태도는 정반대가 되었다. 또 하나 완주군청은 오랫 동안 전주시내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현 군수의 임기 동안에 완주군 관내에 새 청사를 지어 옮겼다. 그런데 새 청사에 입주하기도 전에 도지사-전주시장과 더불어 전주-완주통합 추진하기로 공식 발표한 것이다.

 

아무튼 정치라는 게 원래 그렇다 치고.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은 통합이 이 고장 사람들의 삶에 이로운지 또는 해로운지가 될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기업유치에 도움이 되나, 지역개발에 도움이 되나 따위를 놓고 벌이는 '통합효과' 논쟁이 거북하기만 하다. 나는 오히려 통합명분에 깔려있는 '묻지마 개발' 논리가 무섭다. 지난 수 십 년 동안 '중단없는 개발'을 해왔는데 아직도 모자란가? 무슨 공장을 짓는다, 아파트를 짓는다, 관광시설을 짓는다 해서 농사지을 땅이 줄어들어 식량자급률이 갈수록 떨어지는데도? 자연을 보존해야 한다는 생태주의 관점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개발을 위해서는 그 곳 주민은 땅을 내놓고 고향을 떠야 한다. 땅값이 올라 좋지 않겠느냐고? 물론 '땅부자'는 그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뙈기밖에 없는 대다수 주민은 어찌 될 지 불을 보듯 뻔하다. 자연생태계를 살려두는 것이 이 고장 주민에게 더 큰 가능성을 남겨두는 길이다. 시골 사람이 사는 길은 어쨌든 농사가 기본이 되어야 하는데, 농사지을 터전이 사라져 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묻지마 개발, 수 십 년이면 되지 않았나. 이젠 그만 둘 때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