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2. 22:11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한 번 농사철로 접어들고 나니 일거리 많아지고, 된 일도 늘어난다. 오늘은 말 그대로 꼭두새벽부터 '삽질'을 하고 왔다. 며칠 전, 장대비가 내리는 바람에 철수했던 고추밭 비닐멀칭을 해치운 것.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다섯시였다. 간밤의 술기운 탓에 띵한 머리와 쓰린 속을 달래가며 힘들게 몸을 일으킨 뒤 밭으로 갔다. 그 때까지도 동이 트지 않았는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더니 한 사람이 쇠스랑으로 땅을 고르는 게 보인다. 가까이 가서야 그게 주란 씨임을 알 수 있었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이가 더 많은 걸 보니 역시 너무 이른 시간임에는 틀림없다.
나 또한 쇠스랑을 집어 들고 밭두둑을 고르기 시작했다. 비를 머금었던 땅이 굳어 작업하기가 뻑뻑하다. 그래도 땅을 고르지 않으면 비닐을 씌울 수 없으니 꾸역꾸역 해나가는 수밖에. 그렇게 둘이서 30분이나 작업을 했을까, 그제서야 다른 이들이 차례로 도착한다. 모두 일곱 명, 여자 넷에 남자 셋. 그 때부터는 일을 나눠 여자 둘과 남자 둘이 한 조가 되어 비닐을 씌우고, 나머지 셋은 계속 두둑을 고르기로 했다.
애초 8백평 모두를 고추를 작정이었으나 위쪽 절반은 물빠짐이 시원찮아 고추 대신 참깨를 심기로 했단다. 참깨도 비닐을 씌워야 하지만 씨를 뿌리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그래서 오늘 비닐을 씌워야 하는 넓이가 반으로 줄었다. 그런데 얼마전까지 '석유농업'이 걸린다며 비닐을 씌우지 않겠다던 주란 씨도 결국은 멀칭 대열에 끼기로 했단다. 밭이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풀매러 오가기가 녹록치 않은 탓이다. 동지가 늘어 반겨야 하는지, 대책없음에 씁쓸해 해야 하는지 종잡을 수 없다. 나 또한 비닐을 쓰지 않는 원칙에 공감하지만 현실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해서 섞는 비닐, 이른바 생분해성 비닐을 쓰면 웬만큼 심정의 부담을 덜 수 있지만 늑장을 부리다보니 신청기간을 넘기고 말았다. 그건 그렇고...
멀칭작업은 여자 둘이서 비닐 한 롤을 양쪽에서 붙들고 풀어나가면서 두둑에 덮어놓으면, 남자 둘은 삽으로 흙을 퍼서 두둑 양쪽의 비닐을 눌러주는 방식이다. 몇 년 묵은 밭이라선지 크고 작은 돌맹이들이 많이 섞여 있어 삽질이 여간 힘들지가 않다. 자꾸만 삽날이 돌뿌리에 걸려 흙을 푸기 어렵다. 한 10분 남짓 삽질을 했을까,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몸이 풀리면서 사람들의 입도 풀려 객쩍은 농이 오고 간다.
"고추모 옮겨심고 나서 몸보신 혀줘야는디..."
"개 한 마리 잡어? 근디 그거 못 먹는 사람도 있잖여"
"산에 가서 전 붙여 먹는 것도 괜찮지"
"아예, 천렵을 혀서 어죽이나 끓일까?"
일을 하는 동안에도 옆길로 사람들이 너댓 지나갔다. 차림새를 보면 고사리 꺾으러 가는 게 틀림없단다. 지금이 한창 고사리철이니까. 우리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지나간 이들은 고사리인 듯 한 짐을 지고 돌아가고 있다.
처음엔 일 끝내는데 얼마나 걸릴지 걱정이었는데, 역시 일꾼이 많으니 금새 끝난다. 8시 반이나 됐을까, 시작한 지 세 시간 남짓만에 비닐 씌우기 작업이 끝났다. 누군가 싸들고 온 배즙과 두유로 갈증을 날래며 다음 작업일정을 상의했다. 애초 오는 6일, 그러니까 월요일 날 고추모를 옮겨심을 예정이었는데, 그날 일이 겹치는 이가 적지 않다. 결국 7일로 하루 늦췄다. 비닐에 구멍뚫기, 물주기, 고추모 뽑아서 나르기... 따지고 보니 해야 할 일거리가 만만치 않다. 나야 이 분들 뒤를 졸졸 따라 가며 시키는 일 열심히 하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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