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자뷔... 가뭄의 악몽

2013. 6. 6. 23:25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헉! 이건 아니다. 올해는 가뭄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니, 지난해의 끔찍한 기억 때문에 그리 고대했을 뿐인가? 하지만 분명, 지난해 같은 조갈현상은 없을 것이라고 머리 속에 입력이 돼 있다. 그런데 왜 이러지?

 

어제 인문학강좌 뒤풀이 자리에서 끔직한 얘기 두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못자리, 모가 자랄 만큼 자랐는데 모내기가 좀 늦어지면서 뿌리들끼리 얽히고 설키는 현상이 일어나면 이앙기 작동 때 문제가 심각해진다는 경고. 둘째, 모내기 앞두고 물을 잡아야 할텐데, 지금 그게 쉽지 않을 거라는 얘기. 술이 확 깰 정도는 아니었지만 긴장이 되었던건  사실이다.

 

마음 같아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살펴보고 싶었지만, 막걸리의 뒤끝이 그리 좋지 않은 까닭에 해가 중천에 떠서야 길을 나섰다. 먼저 못자리. 모 상태를 살펴봤지만 뿌리가 얽힌 현상은 발견하지 못했다. 다행이다.

 

이제 물을 보러 가야지. 끼릭끼릭, 자전거 패달을 밟으며 간다. 중도에 모를 내고 있는 동네 어르신과 조우. 어째 표정이 떨떠름하다.

"모 내시네. 근데 뭔 문제 있어요?"

"잉~ 모 뿌리 쪽이 썩었는지, 자꾸만 걸리네. 이앙기 핀이 착착착착 치고 나가야 쓰는디... 저거 봐, 한 줄이 왕창 빈 칸이잔여!"

그러고보니 한 줄이 아예 텅 비어있다. 하지만 내가 도와줄 일은 없고... "워쩐대유?"만 연발하다가 "그럼, 욕보세요" 하고 가던 길을 재촉.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다. 물이 말라가고 있지 않은가. 모내기 사흘 전에는 로터리를 치고 써래질을 해야 한다. 이 때는 반드시 논배미에 물이 철렁철렁 채워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물이 바닥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그 동안 너무 방심했다. 두 어 차례 내린 비 때문이었을 게다. 그거 믿고 헛지랄을 많이 했고, 딴청도 많았다. 그러니 하늘이 벌을 주신 거다. 이래 가지고서야 어디 모내기가 가능하겠나. 그래도 아직 한 가닥 희망이 있는 건, 샘골 가운데 배미 옆 농수로 수멍을 열면... 걸음이 빨라진다. 하지만... 농수로가 말라 있다. 물높이는 수멍에 한참 못 미쳐 있다. 아득해온다. 이 노릇을 어찌 할 것인가. 오는 10일 모내기를 하기로 했으니, 늦어도 8일에는 써래질을 해야 할 텐데, 물이 말라 있으면 불가능하다. 남은 건 물을 푸는 방법말고 없다. 어떻게? 당연히 펌프(양수기)로!

 

그제서야 생각 난다. 엊그제 운영 씨가 했던 말.

"풀 나무 파쇄기 중고로 구입하면서 모터펌프 중고도 싼값에 흥정해 뒀는데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전화를 걸었더니 다행히도 아직 유효하단다. 점심을 뜨는 둥 마는 둥, 모터펌프를 찾아 길을 나섰다. 그 가게는 금새 찾을 수 있었다. 간단한 시험가동을 거쳐 신제품의 1/3 값을 치르고 철물점을 향했다. 필요한 부속품를 사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 조립하고 논으로 출발!

 

몇 차례 시행착오를 거쳐 모터펌프는 물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그 기쁨도 잠시, 지난해의 악몽이 떠오른다.(백년만의 가뭄..."니들이 '둠벙'을 알아?" ) 바로 이 장면이다. 농수로에 저 모양의 양수기들이 나래비 서서 물을 빨아올리던 장면. 나락이야 타 죽진 않았지만 물높이가 낮으니 피가 올라오고, 우렁이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을 맞았던 것이다. 지긋지긋 하던 그 놈의 피사리. 그래서 작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물높이를 높이 유지하리라... 그런데 저리 물이 말라가고 있지 않은가. 지난해 이 맘 때, 바로 그 장면이다. 하늘은 어찌 이리도 무심하단 말인고...

 

목마른 자가 시원한 음료에 빨대를 꽂듯 모터펌프 흡입구를 꽂는다. 물이 콸콸 쏟아진다. 그 사이 논두렁 보강공사-그래봤자 쇠스랑이나 삽으로 흙을 떠서 논두렁을 조금 높이는 일-를 한다. 한 두 시간이 지났을까. 모터펌프 근처에서 꾸룩꾸룩 소리가 난다. 물높이가 낮아졌다는 신호다. 후딱 달려가보니 역시 그렇다. 빨대를 꽂았던 수로의 물이 바닥을 보이고 있다. 세상에...

 

물이 빠져나간 수로에서 메기 몇 마리를 주웠지만 그닥 흥이 나지 않는다. 급히 부른 운영 씨도 붕어 몇 마리 노획하는데 그쳤다.

"우리는 매운탕 끓일 줄 아는 사람도 없고..."

 

꽤 씨알이 굵은 메기 대 여섯 마리를 운영 씨한테 건넸다. 벌써 해가 서산 마루에 뉘엿뉘엿... 자전거에 몸을 실은 후줄근한 사내의 그림자가 참 길기도 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