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19. 22:40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몹시도 바쁜 하루가 지났다.
역시 농사일로 바빠야 시골사는 느낌 제대로 난다.
그런데... 먹거리는 어차피 돌고돌아야 하는 법!
이른바 '유통'이란 것도 큰 틀에서 농사렷다. ...
요즘 내가 쌀을 '처분하는' 방식은 '도농직거래'라고 한다.
그런데 유통방법도 여러가지.
아침나절, 주란 씨가 전화를 한 것도 유통 때문이다.
"현미 40키로, 고산시장으로 갖다 주세요"
주란 씨는 토요일마다 읍내시장에 '좌판'을 벌인다.
얼마전 문을 연 '관광형 전통시장'에서 '공인노점'을 하는 것.
<아기자기 텃밭>이라는 '상호'도 달았다.
여러가지 푸성귀와 참기름, 들기름, 효소, 고춧가루, 밤...
텃밭에서 손수 기른 유기농 먹거리를 파는 거다.
정화 씨도 함께 하는데, 재미가 쏠쏠하다나?
말인즉슨, 우리 현미도 소포장(2키로)해서 팔테니 갖다달라는 얘기다.
마다 할 까닭이 없지않은가. 할 일이 태산이라 문제지...
다음 행선지는 바깥밤실 고추밭.
조만간 양파를 심어야 하니 밭을 갈아야 한다.
밭갈이를 운영 씨한테 부탁해뒀는데 밭 위치를 잘 모르니 갈켜달란다.
바쁘지만 워쩔겨, 갈쳐줘야지...
그 다음은 방앗간.
바깥에 쌓아 둔 왕겨와 쌀겨를 아직 실어오지 않았다.
또 그 다음은 분토골, 나무받침대(빠레트) 몇 장을 실어왔다.
이어 옆마을 율소리에 쌀 40키로 한 포대 '배달'.
점심을 먹고 나서는 오늘의 '메인 이벤트' 말려둔 나락 쓸어담기.
'요령은 전과 동!'.
한참 나락을 담고 있는데 정화 씨가 차를 몰고 지나다 멈춰섰다.
"오늘, 고산시장 노점 현미 대박! 40키로 다 팔았어요!"
나락을 모두 담아 트럭에 싣고 있는데 승용차 한 대가 스르르 멈춘다.
50대 후반으로 뵈는 아주머니가 바꼼이 고개를 내민다.
"혹시... 샘골 아랫논 지으시는 분인가요?"
"그렇습니다만..."
우리 바로 윗논을 짓는 분이었다. 때아닌 '물꼬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다.
(설명이 좀 복잡하니 '논 배수체계'에 관심없는 이는 그냥 건너 뛰시라.)
논을 말려야 하는 가을엔 윗배미에서부터 내려오는 물이 골칫덩이다.
어느날 둘러보니 윗논 가운데로 물길이 나 있고(여기선 이를 '도구친다'고 한다), 논두렁을 파 물꼬를 내놓았다. 그럼 그 물이 모조리 우리 논으로 내려오고, 그러면 논바닥이 마를 수가 없다. 지난해도 그래서 애를 먹었다. 갑자기 '뚜경이 열리면서' 물꼬를 다시 메워버렸던 것이다. 그러면 위에서 내려온 논물은 옆으로 난 고랑을 타고 내려가지만 윗논의 물길(도구)에는 물이 고이게 된다. 그냥 흘러갈 때보다는 질척거리게 된다. 그러니까 이 아주머니는 '왜 물꼬를 막아서 수확작업을 힘들게 만들었느냐'고 따지는 거다. 나는 나대로 '물꼬를 그렇게 내버리면 아랫논 다섯 배미는 물을 뺄 방법이 없는데,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맞받았다. 이런 말싸움의 끝은 뻔하다. 한쪽의 말실수를 빌미로 논점이 옮겨가고... 아무튼 다행히도 둘 다 선을 넘지 않은 덕분에 끝은 좋게 마무리가 되었다.
'물꼬싸움'을 마치고, 나락포대를 모두 트럭에 싣고 보니
이미 해는 떨어졌고, 가로등 불빛이 환하게 비친다.
그래도 지난번보다는 작업시간이 꽤 줄어든 것 같긴 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죽을 때가 다 된 주란 씨네 트럭은 탈탈,
뜻하지 않은 말다툼의 씁쓸한 뒷맛에 내 입은 툴툴.
'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 > 여름지기의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찰현미' (0) | 2013.10.26 |
---|---|
수확이 단지 기쁨만은 아님을... (0) | 2013.10.23 |
방아를 찧었다 (0) | 2013.10.18 |
'소농'의 비애 (0) | 2013.10.18 |
논바닥 말리기-2013 (0) | 2013.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