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이 단지 기쁨만은 아님을...

2013. 10. 23. 12:41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농번기는 농번기인 모양이다. '번거롭고, 복잡하다'는 뜻 그대로다. 게다가 오늘은 정말이지 '폭폭한' 일이 꼬리를 물었다.

 

역시 일은 '느닷없이' 시작됐다. 막 점심을 끝냈는데 전화가 울린다. 제실 강 씨, 밭갈이 때문인가 싶었는데...

 

"있잖유, 시방 시암골 나락 비고 있으니께 빨랑 나와요"

한나절 앞두고 알려주다가, 1시간 전에, 이번엔 아예 일 시작하고 나서 일방적 통보라니... 그저 헛웃음이 나왔다. 30분 남짓 하던 일을 정리하고 있노라니 다시 전화가 울린다.

 

"시방 한 통이 다 차서 나락 널어야 쓰겄는디, 멍석 깔아놨대유?" h

멍석은 젠장... 알았노라고, 뒷정리고 뭐고 나락 말리는 도로로 내달렸다. 허겁지겁 멍석망을 펼치고 있자니 강 씨가 트럭을 몰고와 나락을 쏟아붓는다.

 

 

"여기는 나중에 허고, 시방 논이 더 급혀요. 보니께 밑도 안 돌려봤더만..."

허~ 그랬다. 작업을 앞두고 논 귀퉁이을 낫으로 베어놔야 콤바인이 수월하게 방향전화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지난번 안밤실 수확 이후 나락 말리랴, 퍼담으랴, 방아 찧으랴, 배송 준비하랴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밑돌리기 작업을 깜빡했던 것. 게다가 몇 시간이라도 미리 알려주면 할 수 있었을 텐데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이리저리  허둥거리며 밑 돌리기를 했는데, 그건 일도 아니었다.

 

작업을 마친 맨 아래 배미 한 쪽 귀퉁이를 보니 50평 남짓 벼포기가 그대로 서 있다. 뻔하지, 논바닥이 질척해서 작업을 포기한 거다. 대충 밑돌리기를 마치고 나서 콤바인이 외면한 곳의 벼베기에 뛰어들었다. 역시 진창이다. 그런데 이 또한 시작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 윗 배미는 두 군데, 각 1백여 평씩 작업을 포기했다. 얼핏 보기에도 바닥이 너무 질다. 얼마전까지 그럭저럭 바닥이 말랐었는데 왠 일인가 싶었더니, 아뿔싸! 바로 윗논에서 수확을 마친 뒤 물꼬를 터 놔 버린 것이다. 윗논은 지금도 물이 흥건히 고여있고 물꼬를 따라 쉴 새 없이 흘러들고 있지 않은가. 한 일주일을 저 모양으로 물을 받았으니 뻘밭이 되지 않은 게 다행인지 모르겠다. 망치를 뒷머리를 얻어 맞은 듯 눈 앞이 아득해온다. 그제서야 며 칠 전, 나락 말리는 도로가에서 그 집 아주머니와 벌인 '물꼬싸움'이 무슨 뜻이었는지 떠오른다. 화가 치미는 대신 그저 허탈해진다. 그나저나 2백평 넘는 저 넓은 논을 어찌해야 옳을까.

 

 

 

사고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찰벼를 심은 맨 위 네 마지기 배미 수확을 하던 콤바인이 구석을 돌다가 바위를 밟는 바람에 캐터필러의 고무바퀴가 벗겨지고 만 것. 콤바인을 몰던 어르신은 "큰 일 나부렀네. 이거 워쩐디야. 오늘 작업 땡쳤네"를 연발하며 안절부적이다. 콤바인 본체를 들어올린 뒤 복구작업을 해야 하는데, 정비소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나로선 옆에서 죄인마냥 아무 말도 못하고 걱정어린 표정만 지을 뿐. 그렇게 30분이나 흘렀을까. 나락을 쏟고 돌아온 강 씨의 제안으로 혹시 모르니 후진을 해보기로 했다. 천만다행으로 조금 벗겨졌던 고무바퀴가 제자리를 잡았다. 작업은 곧장 재개됐다.  

 

 

시간을 지체한 탓에 날이 저물도록 일을 끝내지 못했다. 하지만 어쨌든 농사일이란 중도에 그만 둘 수 없으니 전조등을 켠 채 작업을 강행했다. 사방이 깜깜해서야 일이 끝났다.

 

머릿 속이 물 먹은 솜처럼 묵직하고, 흐물거리는 느낌이다. 수확작업을 포기한 2백평은 어찌할거며, 저 많은 나락은 또 언제 말리고 담을 지, 방아를 찧을 지 쌓아둘지... 자꾸만 헝크러진다.

'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 > 여름지기의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파모 옮겨심던 날  (0) 2013.10.29
'찰현미'  (0) 2013.10.26
나락을 담다가...  (0) 2013.10.19
방아를 찧었다  (0) 2013.10.18
'소농'의 비애  (0) 2013.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