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3. 15. 21:53ㆍ누리에 말걸기/<함께하는 품>
온종일 비가 내렸다. 아침엔 날씨가 쌀쌀해서 ‘봄비’가 맞는가 싶었다. 하지만 이젠 3월 중순, 오후가 되어 날이 풀리니 그 봄비가 틀림없다. 추적추적 들녘을 적시는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은 싱숭생숭, 아련한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래, 너도나도 봄비를 노래했지. 봄비는 여름날의 소나기나 우산 속 가을비, 겨울의 찬비와 달리 그 자체 어떤 의미가 아니다. 무언가를 가리키는 팻말이거나 맞은편으로 건네주는 징검다리 같은 것. 그렇지, ‘이 비 그치면’ 뭔 일이 벌어지게 돼 있다. 겨우내 메말랐던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매화는 꽃망울을 터뜨리고, 풀꽃은 한결 싱그러움을 더하고… 농심은 한껏 조바심치는 거다. 그래, 마침내 봄이 온 게야.
당신은 어디서 봄을 느끼는가. 재래시장 좌판에 놓인 달래, 냉이, 쑥 따위 봄나물? 공원에서 자라는 나무의 새움? 살갗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 그 모두일 거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손님, 그게 봄이다.
헌데 봄을 느끼는 계절감각은 ‘자연 속에 사는’ 농사꾼이 더 떨어진다면 뭔 얘긴가 싶을 것이다. 이게 다 산업사회의 씁쓸한 역설인데, 시설재배로 ‘제철’이 흐릿해진 탓이다. 온 들판에 널린 비닐하우스 안에서는 엄동설한에도 딸기가 익어가고, 상추 같은 잎채소를 따낸다. 설사 시설이 아닌 노지재배를 하더라도 비닐하우스에서 모종을 기르는 게 보통이다. 한겨울에 새싹이 올라와 이미 봄을 느껴버리니 진짜 봄이 와도 무덤덤한 거다.
고추가 딱 그렇다. 지난번에 일렀듯이 전남 곡성 사는 벗한테서 토종고추 ‘칠성초’ 씨앗을 구해왔다. 때마침 곡성 읍내에서 열린 토종씨앗 나눔행사에 들러 역시 토종인 ‘곡성초’ 씨앗도 받아왔다. 그 귀하신 몸을 며칠 동안 젖은 무명주머니에 넣어 눈을 틔웠고, 상토를 깐 모판에 묻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일을 그르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웬일인지 떡잎도 올리지 못한 채 스러져버렸다. 아무래도 경험부족 탓이 컸을 듯싶다.
진안에서 자연농 하는 이에게 하소연을 하니 칠성초 씨앗을 보내줬다. 그걸 <온새미로> 식구 중 고추농사 좀 지어본 영자 씨한테 맡겼다. 하지만 웬걸, 이번에는 눈조차 틔우지 못했다. 그래도 어쩌겠나. 염치를 무릅쓰고 곡성 사는 벗에게 다시 손을 벌렸더니 이번에도 선선히 보내왔다. 다행히 눈을 틔웠고, 모판에 넣어 운영 씨네 비닐하우스에 ‘모셔’놨는데... 삼세번 애쓴 보람도 없이 칠성초는 결국 우리와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나마 정화 씨가 육종연구소에서 얻어온 신품종 모종이 그럭저럭 자라고 있어 다행이다. 더욱이 고추 심을 밭을 더 빌리려던 계획이 틀어지는 바람에 ‘식부면적’도 줄었다. 이젠 칠성초 모종을 몇 포기 얻어다가 다음해 심을 씨앗이나 벌어야지 싶다. 농사라는 거는 한 해에 딱 한 차례 기회가 주어지니 어쩔 도리가 없다.
생태공동체 <온새미로>는 올해 양파와 신품종고추 농사를 함께 짓는다. 비록 토종고추에서는 쓴 맛을 봤지만 우리의 생태농사는 지속될 것이다. 아울러 겨울 한 철 쉬었던 유기농 노점(아기자기텃밭)도 봄소식과 함께 다시 좌판을 깔았다. 의욕 넘치는 주란 씨와 정화 씨는 비닐겉봉에 붙일 스티커라벨도 주문 제작하고, 벼룩시장까지 손을 뻗었다.
한편 우리집 올해 벼농사는 꽤 늘어날 것 같다. 안밤실 광수 씨가 사정이 생겼다며 짓던 논 열 닷 마지기를 넘겨주겠단다. 그렇게 되면 벼 경작면적은 지난해보다 50%나 늘어난다. 유기농 치고는 부담스러운 면적이다. 그래도 어찌 되겠지 싶고, 무엇보다 살림살이가 좀 더 피었으면 싶다. 하지만 쌀 수입 부분개방 국제협정이 올해로 만료되는 가운데 정부가 완전개방(관세화) 방침을 굳혔다는 소식이다. 권력 쥔 놈들이 언제는 불쌍한 중생들 챙겨준 적 있었냐마는 막상 닥치고 보니 머리는 무겁고 가슴은 답답하다. .<함께하는 품> 11-1호 (20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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