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달'이 농사를 밀고 간다

2014. 5. 5. 16:21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학습효과'라는 게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경험의 세계를 뜻한다면 농사야말로 거기에 딱 들어맞는 분야다. 설익은 판단일 수도 있지만 농사를 이태 지어보니 그렇더라는 얘기다. 한 번 호되게 당해야 그 다음부터 정신을 바짝 차리는 원리라고 할까.

 

첫해는 아는 게 없으니 동네 어르신이나 앞선 농사꾼이 '시키는 대로' 할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기도 하지만 실물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실제로 마주치는 아주 세세한 문제들은 '매뉴얼'에 잘 나오지도 않는다. 그러니 앞선 이의 '한 마디'은 가히 '하느님 말씀'이나 진배없다. 그걸 잘 아는 어떤 어르신은 "자네 왜 나한테 자문을 구하지 않는가?"고 타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뭐 좀 여쭐라치면 '일장연설'이기 십상이요, 틈만 나면 "유기농? 아, 좋지! 허나 고생헌 만큼 남는 게 없는디? 농약-비료 혀!"를 양념처럼 걸치는 데는 기가 질릴 밖에. 하여 농사경력은 좀 짧더라도 유기농 벼농사를 짓는 이들에게 더 기대어 왔던 것이다. 아무튼 '첫해 농사는 하늘이 봐 준다'는 속설도 있다만 결과가 그럭저럭 괜찮았다.

 

이태 째, 그러니까 지난해는 사실상 내 나름의 첫 농사를 지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경험은 그닥 큰 자산이 못 되었다. 여전히 물음은 끊이지를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지금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당최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결국 몇 번 씩 '대형사고'를 내고 말았다. 못자리를 망치는 바람에 두 번이나 씨나락을 담갔고, 논바닥을 제대로 말리지 못해 낫질로 벼를 베어야 했다. 그 밖의 작은 실수는 이루 다 말할 수도 없다.  

 

지난해 망친 못자리 모습

 

사정이 이렇다 보니 처음 당하는 일이나, 해봤더라도 긴가민가 한 일, 심지어 이거다 싶은 것도 일 삼아 '확인 받는' 버릇이 생겼다. 내 멋대로 꼽은 '벼농사 사부'는 광수 씨다. 나하고 동갑인데 청년시절부터 벼농사로 잔뼈가 굵었고, '논생물 다양성 농법'을 앞서 실천하고 있다. 논생물 다양성 농법은 '쌀'만 보지 말고, 논이라는 '습지'에 사는 다양한 생물을 함께 보자는 거다. 이를 위해 농약, 화학비료는 말 할 것도 없고 퇴비, 유박 같은 유기질비료도 쓰지 않고(무투입), 제초용 오리나 우렁이도 넣지 않는다. 워낙 인력이 모자라니 트랙터, 이앙기, 콤바인 같은 기계를 쓰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논을 다양한 생물이 공생할 수 있는 상태로 유지하려 애쓰는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을 가꿔온 논 가운데 여섯 마지기(1,200평)가 올해 나한테 넘어왔다. 벼농사를 줄일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긴 탓이었는데, 이 농법을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 또한 광수 씨가 오래도록 애써 이룩해온 귀한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진 않다. 하여 새로운 도전-논생물 다양성 농사-에 나서 볼 참이다. 

 

어쩌다가 광수 씨 얘기로 흘렀는데, 광수 씨로 말할 것 같으면 보통사람 눈엔 '기인'으로 비치는 인물이다. '자연주의'랄까 나름의 철학도 뚜렷하고, '쇠고집'이다. 언젠가 내가 소설을 쓰게 되면, 꼭 광수 씨를 주인공 캐릭터로 써 볼 생각이다. 그래서 광수 씨 얘기는 여기까지.

 

이태 벼농사의 학습효과 때문에 오늘도 일찌감치 못자리로 나갔다. 어제는 집안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와 오후 늦게까지 물길을 만들고, 모판 위치를 조정했더랬다. 오늘은 물을 대서 못자리 고랑을 파고, 이랑의 높낮이를 조정했다. 이랑 높낮이가 고르지 못해 모판을 절반이나 버린 지난해의 아픈 기억 때문에 아주 세세히 살폈다. 아는 게 없어 건둥건둥 지나치고, 결국 대형사고를 친 경험을 되풀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오늘부터 모가 제대로 자랄 때까지는 아침, 저녁으로 두 번 씩 못자리를 둘러보리라 다짐을 하면서.  

 

Before <=  못자리 고랑 내기 => Af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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