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8. 4. 20:42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찌는 ‘천고마비’ 계절은 아직 멀었다. 지금은 ‘하늘은 변덕스럽고, 농사꾼은 삐쩍 마르는’ 계절이다. 딴에는 ‘자연 다이어트’라 눙치고, 보는 사람도 “턱 선이 살아났다”느니, “샤프해졌다”느니 탄성을 내지른다. 하지만 그게 고된 김매기 때문이란 걸 서로가 잘 안다. 날이면 날마다 땡볕 아래서 ‘자연 사우나’를 해대니 오죽 하겠는가.
‘산 넘어 산’이라더니 올해는 그야말로 기가 질린다. 김매기 시작한 지 한 달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처음 무릎 밑에 있던 벼 포기는 이제 허리에 닿을 만큼 자라 운신하기가 거추장스럽다. 벼만 그렇겠나. 논 풀도 부쩍 자랐고 깊게 뿌리를 내렸다. 두 손으로 힘껏 당겨도 잘 뽑히지가 않는다. 심신은 갈수록 지쳐 가는데, 연일 35도를 웃도는 무더위가 이어지니 참 난감한 일이다.
난감한 건 이 뿐이 아니다. 정부가 결국 관세화를 통해 내년부터 쌀을 전면개방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해당사자들과 ‘사회적 합의’도 거치지 않았고, 양곡관리법 개정 같은 국회 동의절차도 밟지 않은 일방적 조치다. 그 결과 내년부터는 기왕의 의무수입물량(40만9천 톤)에 더해 소정의 관세를 물면 쌀을 수입할 수 있게 된다. 정부는 고율관세를 매기면 수입물량은 거의 없을 거라 주장한다. 그러나 한중FTA, 환태평양경제동반장협정(TTP) 협상 같은 변수 때문에 녹록치가 않다는 분석이 많다. 결국 쌀 농가들로서는 큰 시름을 안게 된 셈이다. 오죽했으면 멀쩡하게 자라는 벼를 갈아엎는 시위까지 벌였겠는가.
이거, 남 얘기가 아니라 바로 내 얘기다. 아내가 직장생활을 하는 바람에 밭농사를 짓기 힘들어 어쩔 수 없이 쌀 전업농이 되었다. 하여 쌀 전면개방의 직격탄을 맞을 처지지만 그저 덤덤하다. 원래 천하태평이어서가 아니다. 벼농사에 뛰어들기 전부터 사태가 이리 될 줄 예상했기 때문이다.
사실 우르과이라운드(UR) 때의 김영삼 정권 이래 농민 챙겨준 정권이 있었던가. 이른바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도 다를 게 없었다. 정책을 주무르는 정부 관료들은 온통 성장지상주의, 비교우위론, 자유무역주의 같은 시장논리를 떠받든다. 지구생태, 식량주권 같은 문제는 관심 밖이다. 식량자급률이 20%대로 떨어진 나라에서 반도체 팔고, 자동차 수출하면 장땡이란다. 그러다 한 줌(6%)도 안 되는 농민들이 견디다 못해 떠나고, 나이 들어 세상을 뜨면 대규모 기업농으로 대체하겠단다.
사정이 이러니 쌀이 되었든, 밭작물이 되었든 농사지어서는 답이 안 나오는 것이다. 그저 자연 속에서 내키는 삶을 사는 것으로 위안 삼을 뿐. 쌀 개방은 정작 농민보다는 소비자에게 닥친 위기다. 전면개방 뒤 쌀시장이 요동치면 벼 경작면적은 갈수록 줄어들게 마련이고, 쌀(식량) 자급률도 덩달아 떨어진다. 기후변화가 심상찮은 판에 큰 기상이변이라도 일어나면 돈 주고도 식량 구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니 쌀 전면개방은 결코 강 건너 농민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시장 쌀값이 떨어진다고 박수 칠 일이 아니란 얘기다. 모두가 한 번 더 생각했으면 좋겠다. 지금이야말로 ‘식량주권’, ‘생태가치’에 공감하는 소비자와 농민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뜻을 모을 때가 아닐까 싶다. <완두콩 201408>
'누리에 말걸기 > <농촌별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와일드푸드 축제 뒷담화 (0) | 2014.10.05 |
---|---|
석 달... 아! '세월'이여! (0) | 2014.08.31 |
김매기 또는 처절한 '전쟁' (0) | 2014.07.09 |
타는 들녘 (0) | 2014.06.01 |
벼농사는 시작되고 (0) | 2014.05.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