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절에 볍씨를 담그며

2015. 5. 2. 10:18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51. 노동절이자 고산면민의 날이다. 그러나 노동절대회는 언감생심이요, 면민의 날 행사에는 잠깐 들러 눈도장만 찍고 돌아왔다. 볍씨 담그는 날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한해 벼농사가 다시 시작된 거다. 예년보다 일주일 남짓 늦춘 것인데, 저온현상으로 자칫 냉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해서다.


이른 아침부터 부산스레 움직였지만 이미 여러 차례 경험한 볍씨 담그기가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킬 리 없다. 게다가 올해는 작목반에서 아예 온탕소독을 거친 볍씨를 나눠주는 바람에 소금물로 튼실한 씨앗을 가려내는 염수선만으로 작업은 싱겁게 끝났다. 그래도 지난 몇 달 동안 벼농사모임에서 소양을 쌓은 새내기 농부들은 가벼운 흥분 속에 볍씨를 휘젓거나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며 눈을 반짝인다. 그 골똘한 표정과 서툰 동작을 보노라니 웃음이 절로 난다.


어느덧 4년째. 한결 느긋해진 자신을 발견한다. 농사꾼으로서 그새 많이 익었을 것이다. 보름 전에는 장수군의 한 농가를 찾아 기술지도까지 해준 터다. 귀농한 후배 몇 명이 살고 있는 마을인데, 올해 처음으로 포트모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이미 그 방식을 쓰고 있는 내게 자문을 구한 것이다. 좀 귀찮았지만 한편으론 뿌듯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렇듯 농사 일머리를 대강 꿸 수 있게 되니 바쁜 가운데 한눈을 파는 여유도 부려본다. ‘전북 청소년 노동인권 네트워크(청노넷)’에 힘을 보태게 된 것도 그런 경우. 청노넷은 이름 그대로 청소년들의 노동인권을 지켜주기 위해 여러 개인과 단체가 꾸린 연대기구다. 몇 해 전부터 준비모임을 굴려온 끝에 이달 중순 공식 발족한다. 청소년의 노동권익을 찾아주고 권리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정책연구와 캠페인, 교육-상담활동 등을 펼치게 된다.


농사꾼과 노동인권.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귀농하기 전 내가 노동운동을 했다는 걸 알면 곧장 의문이 풀릴 것이다. 민주노총을 그만 둔 뒤 반평생 노동운동 역정을 갈무리해보자는 뜻에서 <노동인권 이야기>라는 책을 쓰기 시작했고, 이 곳 완주에 내려오고 난 뒤에야 출간하게 됐다.(<완두콩> 20132월호-저자 인터뷰) 뜻밖에 독자들의 호응이 이어져 지금까지 5쇄를 찍었다. 책이 꾸준한 주목을 받으면서 심심찮게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도 했다. 청노넷에 참여하게 된 것도 사실 그 때문이다


처음엔 이런저런 부름에 손사래를 쳤더랬다. 비록 책을 낸 저자라지만 지금은 그 분야에서 떨어져 있는 처지 아니냐 이 말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쌓은 업이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결국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게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는다고 세상이 없어지는 게 아니니까.


인생2을 열면서 스스로 다짐했었다. 언젠가 시골살림이 자리를 잡으면 다시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에 나서겠노라고. 물론 확실히 뿌리를 내리려면 아직 멀었다. 하지만 그걸 핑계로 세상의 부름을 뿌리친다면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 노릇이다.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의 권리를 되돌아보게 되는 노동절. 한 동안은 가장 큰 기념일이던 날에 볍씨를 담그다가 떠올린 생각이다월간 <완두콩> 2015년 5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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