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6. 6. 14:06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6월 초순, 어쩔 수 없는 농번기. 바로 모내기철이다. 누가 뭐래도 벼농사의 절정은 다름 아닌 모내기다. 생각해보라. 나락모를 한 포기, 한 포기 논배미에 꽂아 넣는 그 엄청난 노동을. 그 놈이 뿌리를 내리고, 새끼를 치고, 무럭무럭 자라 포기마다 수천의 나락을 매달아 마침내 밥으로 둔갑하는 자연의 놀라운 섭리를.
모내기 자체는 직파재배보다 엄청난 품이 들지만 제초가 훨씬 쉽고, 소출은 많은 혁신적인 농법이다. 우리나라에는 고려말~조선초 도입됐지만 여러 사정으로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뿌리를 내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 즈음의 짧은 기간에 모내기를 마쳐야 하므로 끌어낼 수 있는 노동력을 총동원할 수밖에 없다. ‘모내기철에는 고양이 손도 빌린다’는 게 결코 빈말이 아닌 셈이다.
온 동네 젊은 일꾼들이 한 자리에 모이니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자연스레 잔치판이 벌어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엄마가 모내기 두레에 나선 아이들 끼니는 누가 챙기나. 그러니 모내기 판의 점심, 새참 때 동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건 당연하다. 모내는 집은 그걸 감안해 먹거리를 넉넉하게 준비하는 것이고. 이런 마당에서 풍장이 울리고, 막걸리 몇 잔에 소리 한 자락 나오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나.
그러나 옛날 얘기일 뿐이다. 오늘날, 이런 모내기에는 반드시 앞에 ‘손’또는 ‘줄’이라는 말을 집어넣어야 한다. 게다가 이젠 꿈도 꿀 수 없는 얘기가 되었다. 손도 없고, 줄도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람’이 없다. 손과 줄과 사람이 있던 자리는 ‘이앙기’라는 이름의 기계가 들어섰다. 모내기의 주인공은 바로 그 기계다. 사람은? 그 기계에 모판을 대주는 ‘시다바리’일 뿐.
모내기철, 이 땅 어디를 둘러봐도 흥청대는 잔치판은 없다. 기계 한 대와 그것을 보조하는 사람 한 둘이 바삐, 그리고 따분하게 움직일 뿐이다. 이런 모내기가 처음 한 두 해는 ‘싱겁게’ 느껴지더니 이제는 ‘재미없게’ 다가온다. 그런데 이앙기가 모내기의 주인공 자리를 내주지 않는 한 앞으로도 흥청대는 모내기 판은 보기 힘들지 싶다. 농사꾼들이 이해타산을 벗어나거나, 농업인구(귀농인구)가 지금보다 적어도 열 배 쯤 늘어나거나 하면 모를까.
물론 지금으로선 꿈일 뿐이다. 그렇다고 ‘몽상’이라고만 내쳐버릴 일도 아니다. ‘돈이 곧 밥’인 세상인지라 돈을 우습게 볼 일은 아니지만, 보람이나 가치보다 앞세울 건 아니지 싶다. 생명과 생태라는 가치를 일구면서도 농사가 즐겁다면 좀 적게 벌더라도 훨씬 괜찮은 삶이 아닐까? 기계화된 농사은 고독한 노동이다. ‘함께 짓는 농사’야 말로 재미있는 농사의 첫 걸음이다.
그 점에서 이제 반년을 넘어선 우리 벼농사모임이 전통시대의 두레 같은 공동체로 커갔으면 한다. 달포 전 못자리 앉히는 작업을 하던 날, 나는 그 가능성을 봤다. 기계 벼농사에서 한꺼번에 가장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공정이 바로 못자리 작업이다. 열 댓 명이 죽 늘어서 함께 모판을 나르고, 걸친 새참과 점심을 함께 나누며 쉬엄쉬엄 일하던 그 날의 기억이 여전히 새롭다. 물론 곧 시작될 모내기는 사뭇 다를 것이다. 어차피 이앙기가 주인공 노릇을 할 테니 말이다.
그래도 혹시 아나? 모내기를 앞둔 이번 주말 벼농사모임 ‘들놀이’를 간다. 그 옛날 ‘모내기 잔치’를 대신할 수도, 두레의 꿈이 영그는 자리가 될 수도 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월간 <완두콩> 2015년 6월호 칼럼
'누리에 말걸기 > <농촌별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농사, 희망은 있는가? (0) | 2015.08.01 |
---|---|
농사? 이런 맛이지! (0) | 2015.07.04 |
노동절에 볍씨를 담그며 (0) | 2015.05.02 |
잔인한 시절의 '봄 노래' (0) | 2015.04.05 |
되살린다는 것 (0) | 2015.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