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4. 09:54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지난해 이맘때를 떠올리면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김매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피를 뽑아야 하는 논이 스물 닷 마지기나 남았다. 그야말로 ‘전쟁’이다. 때로는 푹푹 찌는 논배미에서 숨이 멎어버리는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난다.(<완두콩> 2014년 7월호)
여기저기 우거진 논풀과 사투를 벌이느라 스스로 ‘농사꾼으로서 큰 고비’라 부를 만큼 힘든 시기였다. 결국 풀이 다 자라 더는 손 쓸 필요가 없을 때까지 달포 반을 매달렸더랬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기억.
그런데 올해는 아주 딴판이다. 6시간 만에 김매기가 끝나버린 것이다. 6일이 아니라 분명 여섯 시간, 다른 일 하는 틈틈이 해치웠으니 하루 하고 한 나절 걸렸다. 그 속에는 “피사리가 대체 얼마나 힘들다는 건지 겪어보고 싶다”던 우리 벼농사모임 아낙 두 명의 ‘김매기 체험’ 2시간이 섞여 있긴 하다. 아무튼 싱겁다 못해 믿기지 않을 만큼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진 셈이다.
“혹시 모두가 잠든 야밤에 제초제 뿌린 거 아냐?” 이럴 때 가끔 나오는 농반진반의 얘기다. 물론 1만평 드넓은 논배미의 벼포기를 붙들고 물어보면 진실을 알 수 있겠지.
올해로 4년째, 아직은 얼치기 농사꾼이지만 결과를 놓고 나름대로 분석해볼 만큼은 된다. 우리 논뿐만 아니라 이 고장의 다른 논에서도 올해는 논풀이 그닥 올라오지 않았다. 따라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은 아마도 어떤 자연적 요인이 작용했을 법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림짐작일 뿐이고, 나로선 지난 3년의 농사경험이 녹아든 결과로 믿고 싶다.
돌아보니 우리 논의 논풀은 ‘해거리’ 양상을 보여 왔다. 첫해와 3년째(지난해)가 무성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첫해는 우렁이를 풀어놓으면 다 알아서 해치우는 줄 알았다. 그러다가 샘골 큰 배미에 빽빽이 올라오는 피에 놀라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나중엔 오기가 생겨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리석게도 한 달 동안 그곳에만 매달렸더랬다. 첫해보다 심했던 지난해는 그나마 이런저런 제초기계를 동원하고, 여기저기 자문을 구하는 등 나름 ‘전략적으로’ 대처했으나 말 그대로 중과부적이었다.
올해는 이런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처음부터 바짝 긴장했다. 모내기철 극심한 가뭄으로 물 잡기도 버거웠던지라 내심 걱정이 컸다. 논바닥이 드러나면 논풀이 쉬이 올라오는 탓이다. 해서 써레질 직후부터 우렁이를 집어넣고 논물이 마르지 않도록 하루가 멀다 하고 둘러봤다.
그럼에도 뜬모잡기(모 때우기)를 하면서 보니 논풀은 적잖게 올라왔다. 이번에는 ‘뜬모잡기부터 빨리 끝내고...’ 대신에 논풀 발생상황을 꼼꼼히 살피면서 그 때마다 곧바로 대처했다. 특히, 다른 논배미에 있는 ‘경력 우렁이’를 옮겨 넣었는데 그게 효과가 컸다.
요컨대 올해의 ‘기적’은 섬세한 관리, 전략적이고 종합적인 대처 덕분이라는 게 이 얼치기 농사꾼의 분석이다.
모내기를 끝낸 지 이제 한 달 가까이 되었다. 무심코 지나치는 사람들 눈에 들녘은 무척이나 한가로워 보이는 때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엔 농부들의 ‘고독한 노동’이 이어지고 있다. 농사는 역시 ‘경험’이라지만 자연의 힘 앞에서는 그마저 보잘 것 없다. 그러니 올해 같은 꿈같은 일을 자연의 선물이라 여기고, 그 맛에 농사를 이어가는 거겠지 싶다. 월간 <완두콩> 2015년 7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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