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는 익을수록

2015. 9. 1. 11:42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찜통더위가 언제였던가 싶게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입추는 한참 전이고, 처서도 지났으니 그럴 밖에. 뉘라서 가는 세월을 막을 수 있을까. 어느새 9, 계절은 이미 가을로 접어들었다.


그 변화는 들녘에서도 감지된다. 검푸른 생명력을 뿜어대던 논배미에는 연두 빛이 넘실댄다. 벼이삭이 고개를 내밀면서 색조가 조금 옅어진 까닭이다. 몸집 불리기에 바쁘던 영양생장을 지나 열매(나락)를 맺는 생식생장에 들어선 것이다. 논배미에는 이 즈음 생명력이 넘쳐흐른다.


지난 한 달 남짓의 짧은 기간에 벼 포기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변화를 거쳐왔다. 줄기 속에 이삭이 생겨나(유수형성기) 조금씩 자라났다. 이삭이 충분히 자라나면 줄기는 새끼를 밴 것처럼 불룩해지는데 이 때를 수잉기라 한다. 이삭이 패면(출수기) 곧이어 벼꽃이 피고 가루받이를 거쳐 수정이 이루어진다. 그러면 벼의 열매라 할 나락이 생기는데, 처음엔 뜨물처럼 묽었다가 차츰 쌀알로 굳어진다. 이삭이 여무는(등숙기) 끝 무렵이 되면 나락을 거둬들이게 된다.


필요한 사람의 손길(농작업)도 그 때마다 다름은 물론이다. 새끼치기가 마무리되는 즈음부터는 뿌리가 산소를 흡입할 수 있도록 하루 걸러서 물을 대고, 떼는 일에 매달렸다. 이삭이 팰 즈음부터는 꽃물이라 하여 다시 물을 흠씬 대줘야 한다. 올해는 다행히도 김매기에 매이지 않는 바람에 벼 줄기를 뽑아다 해부하는 여유까지 부리며 생장단계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삭이 패고, 가루받이가 끝나 여물어가면 다시 물을 끊게 된다. 물 빠짐이 좋지 않은 논배미는 도랑을 치고, 벼 포기 사이로 물곬(도구)을 내어 물을 빼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콤바인 수확작업에 애를 먹기 때문이다. 수풀이 길게 자란 논두렁을 깎는 일도 만만찮다.


아무튼 이 모든 일거리는 어제까지 다 끝났다. 내일은 벼농사모임 회원들과 더불어 백중잔치(음력 715)를 벌이기로 했다. 함께 논배미를 둘러보며 작황을 살피고, 영상기록을 통해 지난 한 해 농사도 돌아볼 참이다. 술과 음식을 나누며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는 건 두말 할 나위도 없고.


벼이삭은 이제 조금씩 여물어 갈 것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정말 그렇다. 고개를 내밀고 꼿꼿하게 서 있던 놈들이 속이 들어차면서 하루가 다르게 아래쪽으로 숙어드는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보는 요즘이다.


하지만 이 자연의 섭리와는 딴판인 세상사를 대하는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땅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리던 자들은 권력을 쥐는 순간부터 돌변한다. 목에는 잔뜩 힘을 줘 뻣뻣해지고, 세상 모두가 제 것인 양 안하무인이다. 상식도 절차도 무시한 채 힘으로 내리누른다. 머잖아 물러날 그 자리가 마치 종신직이나 되는 듯 미쳐 날뛰는 꼴이 그야말로 가관이다. 이 뻔뻔한 권력놀음에는 중앙권력, 지방권력이 따로 없다.


한 줄기 바람이 스칠 때마다 드넓은 논배미는 푸른 물결로 일렁인다. 그 속에서 고개 숙인 벼 이삭이 흔들린다. 헛된 욕망에 매이지 않고, 뿌린 대로 거두는 자연의 이치를 일러주는 듯하다. 그래, 혹여 있을지 모를 태풍 잘 넘기고 날씨는 순조로워 땀 흘린 만큼만 거둘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겠다월간 <완두콩> 2015년 9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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