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9. 4. 15:48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요 며칠을 ‘하늘 쳐다보는 낙으로’ 살았다. 코발트빛 새파란 바탕에 조각구름 또는 뭉게구름, 때로는 새털구름이 둥둥 떠 있는 풍경은 사람의 심성 깊숙한 곳에 숨은 감탄본능을 일깨우고도 남는다. 마침내 가을이 온 것이다. 결코 식을 것 같지 않던 초유의 무더위도 시나브로 물러갔다. 처서가 고비였으니, 누구라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있을까.
이렇듯 아름다운 가을 하늘과 선선한 바람이 우리를 싸고돌지만, 기후변화가 몰고 온 뜨거운 여름을 결코 잊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한다. 사실 더위가 꺾였다고, 가을이 왔다고 마냥 들뜨기에는 기후환경이 심상치가 않다. 가을이 순식간에 찾아든 길목에는 ‘늦장마’가 함께 했다. 그 바람에 논배미의 벼 포기는 몸살을 앓았다. 거센 비바람이 막 고개를 내밀고 가루받이를 하던 벼이삭을 덮친 것이다. ‘백수현상’이라고, 수정이 제대로 안 돼 여물지 못한 낱알이 솔찬이 눈에 띈다. 수확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하긴 풍작이라고 해도 크게 기껍지가 않은 게 오늘의 농업이다. 해마다 이 즈음이 되면 되풀이하는 넋두리, 흉작이면 당연히 걱정이고 풍작이라도 쌀값 떨어질까 걱정이다. 쌀수입을 전면 개방했지만 ‘의무수입물량’은 그대로여서 쌀은 늘 남아돌아 처치곤란인 지경이다.
쌀 소비량마저 갈수록 줄고 있다. 입맛이 서구화돼 고기소비가 늘어난 결과다. 더욱이 지난해 4월 <밥상, 상식을 뒤집다-탄수화물의 경고>(MBC 스페셜)라는 편향된 프로그램이 전파를 타면서 사정이 더 나빠졌음을 나는 피부로 느낀다. 직거래 쌀 주문량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이다. 이 적은 지면에 시시콜콜 반론을 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답답하기만 하다.
엊그제 농촌진흥청에서 마련한 <농식품 소비트렌트 발표대회>를 제 발로 찾아간 것도 그런 답답함 때문이다. 요컨대 ‘집밥’을 해먹는 경우가 줄어드는 가운데 소득이 많을수록, 나이가 적을수록 쌀을 덜 먹는다는 거다. 내 관심사인 친환경(유기농, 무농약) 쌀의 경우, 사 먹어본 사람은 전체의 15%도 안 되는데, 그나마 사먹는 횟수는 스무 번에 한 번 꼴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해 발표자들은 학교급식 확대, 도시락•냉동밥 같은 가공품 투자확대 따위를 해법으로 내놨다. 근거가 있는 해법이지만 나처럼 직거래로 쌀을 공급하는 농가엔 거의 도움이 안 되는 대책이다.
농사라는 게 사실 ‘판로’에 달려 있으니 너도나도 판로확보에 머리를 싸맨다. 어찌어찌 하여 판로확보에 성공해도 그걸 유지하는 일이 만만치가 않다. 공급하는 농산물의 품질에 문제라도 생기면 그걸로 끝인 게 시장논리 아닌가. 결국은 품질이라는 얘기다.
초과공급인 쌀은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농협과 작목반 같은 생산자단체는 미질을 높이는데 온힘을 기울인다. 고품질쌀 생산기술을 연구해 그 내용을 쌀농가에 보급하느라 애를 쓴다. 직거래로 소비자에게 쌀을 공급하는 나로서는 ‘사활이 달렸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주지 않은 ‘건강한 쌀’은 기본이고 밥맛도 갖춰야 한다. 소출이 줄어들더라도 밥맛을 좋게 하려 질소질 거름을 줄이는 따위의 노력을 기울인다. 집밥이 되살아나는 날을 꿈꾸면서.
두 달 쯤 지나면 지금 여물고 있는 나락을 거둬들이게 된다. 작년산 나락은 아직도 창고에 쌓여 있지만 다행히 많은 양은 아니다. 곧 ‘마지막 방아’를 찧는다. 햅쌀을 만날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월간 <완두콩> 2017년 9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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