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19. 06:35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이런 날벼락이 또 있을까. 그야말로 ‘멘붕’ 상황. 볍씨 담가 모판에 파종하고 사나흘 숙성시킨 2천판을 못자리에 앉혔는데 싹이 올라오지 않았다. 하여 그 공정을 고스란히 되풀이하고 있는 중이다.
귀농하고 지난 10년 동안 ‘쌀 전업농’의 길을 걸었다. 줄곧 밥맛 좋기로 유명한 ‘신동진’ 품종을 지어왔다. 그러나 밥맛은 좋지만 병충해에 취약한 약점을 안고 있었다. 그 탓에 신동진 벼를 심은 농가는 지난 이태 잇따라 대흉작을 맞은 바 있다.
안 그래도 신동진 품종이 개발된 지 20년을 지나면서 기능이 퇴화하는 문제가 있었고, 육종기관에서도 몇 해 전부터 대체품종을 연구해오던 터다. 이에 따라 개발된 ‘참동진’ 품종이 주목을 받아왔다. 요컨대 신동진의 약점이던 내병성을 더욱 높이고 밥맛도 개선했다는 것. 이에 고산의 유기농 벼생산자 단체인 땅기운작목반에서는 작목반원들을 상대로 참동진 품종 설명회를 거쳐 올해부터 신동진 대신 참동진 품종을 보급한 바 있다.
문제는 참동진이 낱알 껍질이 두꺼워 발아가 쉽지 않다는 점. 이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채 볍씨를 보급하는 바람에 다수 농가가 피해를 봤다. 그 동안 해오던 대로 냉수침종만을 거쳐 촉이 제대로 트지 않은 상태로 볍씨를 파종하고 모판을 앉혔는데 결국 발아에 실패하고 말았다. 우리 벼농사두레도 같은 곡절을 겪었다.
연인원 70여명이 열흘 가까이 염수선-냉수침종-모판 파종-싹 틔우기-못자리 앉히기로 이어지는 공정에 쏟아 부은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2천 개나 되는 모판을 못 쓰게 되었으니 ‘멘붕’에 이르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농사를 작파할 수야 없는 노릇이니 정신을 가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다시 볍씨를 받아다가 이번에는 ‘발아기’에 넣고 작동시켰다. 발아가 더딘 참동진의 특성상 기계의 힘을 빌어 촉진책을 쓰는 게 안전해서고 이틀 만에 촉이 텄다. 스무 명 넘는 이가 다시 모여 볍씨 넣기 작업에 나섰다. 못자리에 앉혀둔 모판을 일일이 들어내 싹이 트지 않은 볍씨와 상토를 털어내고 파종기를 돌렸다. 두 번 일을 해야 하는 그 기분이 어떨 지는 굳이 들먹일 필요도 없겠다. 그래도 사람들은 서로를 다독이며 웃음기를 잃지 않았다.
흥이 나지 않는 가운데서도 꼬박 휴일 하루를 바친 사람들. 그렇게 다시 볍씨를 넣은 모판은 지금 싹이 트기를 기다리며 숙성기간을 지나고 있다. 사나흘 뒤에는 이를 못자리에 앉히게 된다.
“농사라는 게 멫 십년을 지어도 맨날 1학년이랑게.”
농사로 잔뼈가 굵은 ‘늙은 농부’들이 늘 하는 얘기다. 평생 해오던 농사도 그렇거니와 하물며 신품종을 처음 짓는 마당에 이런 시행착오야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 당장은 넋이 나갈 만큼 아득하지만 길게 보아 어차피 겪게 될 일이었는지 모른다. 내버린 비용과 시간과 에너지를 생각하면 속이 쓰리지만 좋은 경험 한 셈 치는 것으로 마음을 다잡는다.
사나흘 뒤 삐죽 싹이 올라온 모판을 다시 못자리를 앉히고 나면 아마 세상도 달라 보일 것이다. 앞산을 수놓은 짙은 녹음과 뭉게구름처럼 점점이 박힌 아까시꽃이 다시 눈에 들어오고, 뒷산을 울리는 예쁜 새소리도 다시 들려오겠지. 월간 <완두콩> 2022년 5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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