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29. 13:03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한 줄기 소나기가 시원하게 쏟아지더니 따갑게 내리쬐던 땡볕이 잠시 누그러졌다. 지난 한 주일 어간의 날씨가 이 모양으로 이어지고 있다. 열대우림 지역에서 나타나는 스콜(squall)과 비슷한 현상이다. 아니 그냥 스콜이라 해도 틀림이 없겠다.
오랜 가뭄 뒤에 늦게 찾아온 장마전선이 여느 해보다 오래도록 한반도 상공에 머물고 있다고 하는데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이 땅의 기후가 이미 아열대로 바뀌었다는 것이 정설이고 보면 이 시원한 소나기가 그저 반갑지만은 않다.
가뭄이 오래 이어지던 지난 6월 하순, 어쩔 수 없이 <가뭄>이라는 노래가 입안을 맴돌았었다. (<농촌별곡> 7월호) 어서 빨리 장마가 찾아와 이 가뭄을 씻어주기를 학수고대하던 나날. 그런데 “이 가뭄 언제나 끝나 무슨 장마 또 지려나” 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번엔 큰 장마가 휩쓸고 지나갔다.
제주에서 강원도까지 반도 남부를 여기저기 할퀴고 지나던 장마전선이 끝내 이 고장에도 들이친 것. 하룻밤 사이 3백 미리 넘는 폭우가 쏟아졌다. 산간 계곡에 빗물이 넘치고 산사태가 일어나 이재민까지 나왔다. 보통은 논둑이 무너지고 물이 차는 정도였던 우리 동네도 여기저기 넘어가고 무너지는 피해가 속출했다. 급기야 완주군 전역이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농수로 둑이 무너지는 바람에 내가 짓는 논배미도 두어 곳에 토사가 덮치는 피해를 입었다. 귀농해서 농사지어 온 지 15년 만에 처음 겪는 일이다.
저수지 둑이 무너져 물을 대지 못하는 와중에 가뭄까지 겹쳐 열흘 가까이 김을 매는 생고생을 했더랬다. 그 고생 끝나자마자 이번엔 장맛비에 세차게 얻어맞고 나니 거의 ‘멘붕’ 상황. 장마가 소강상태로 잦아든 뒤에도 논배미에 쌓아둔 모판을 거둬들이다가 트럭이 진창에 빠지는 바람에 트랙터를 불러 몇 시간 사투 끝에 겨우 꺼내는 따위의 크고 작은 사건이 뒤를 이었다.
이렇듯 온갖 고난으로 점철됐던 올 여름도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한낮 기온이 35도를 넘나드는 무더위가 이어지는 나날. 소나기가 내려도 그때뿐, 습도가 오르면서 날씨는 금세 후덥지근하다. 잠을 이룰 수 없는 열대야도 벌써 일주일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그나마 지난 몇 해 동안 겪어온 터라 그만큼 견디는 힘도 늘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겠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직 에어컨을 들이지 않고 버티고 있는 자신이 대견하다. 그러나 쉽지 않을 것이다. 기후위기가 가속되고, 이상기후의 피해가 갈수록 극심해지는 가운데서도 인류는, 특히 권력을 쥔 세력들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그러니 내년 여름에는 올해보다 더욱 혹독한 가뭄과 극한폭우가 우리를 기다릴 것이란 생각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어제는 중간물떼기에 들어간 지 보름 만에 논배미를 두루 살펴봤다. 짝 금이 가 있어야 할 논배미에 물이 차 있거나 젖어 있다. 논바닥이 말라야 뿌리에 산소가 공급되고 헛새끼치기를 막을 수 있는데, 장마전선이 수시로 빗줄기를 쏟아부으니 마를 틈이 없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농사 망칠 건 아니다. 머잖아 벼에 이삭이 생기는데 그때는 다시 물을 흠씬 대줘야 하니 사실 별것도 아니다.
고난이 이어지더라도 낙관의 끈을 놓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노래 <가뭄> 마지막 대목은 “흥흥 흥타령일세 시름도 겨우면 흥이 나나”로 끝을 맺고 있다. 그 곡을 쓴 김민기 선생이 며칠 전 이 세상을 뜨셨다. 그의 노래를 무척 사랑했고, 그 삶을 배우고 싶었던 사람으로서 이제 편히 쉬시기를 빈다. 월간 <완두콩> 2024년 8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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