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5. 11:00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11월하고도 중순, 산야가 온통 단풍으로 물들었어야 마땅하거늘. 지금 창밖에 비친 풍경은 여전히 푸른 빛이다. 벽을 타고 오른 담쟁이만 발그레하게 물이 들었을 뿐. 여느 해 같으면 ‘마지막 잎새’까지 다 떨어져 덩굴만 앙상할 시점이다. 이 어인 조화인지.
하지만 답은 그리 어렵지 않게 풀린다. 올해는 여름이 늦게까지 이어졌으니 단풍 또한 그만큼 늦어지는 게 당연한 자연의 섭리인 게지. 추석이 지나도록 섭씨 35도를 넘나드는 폭염이 지속됐던 기억이 다시 살아난다. 단풍이 늦어서가 아니라 기후변화로 혼란스러워진 자연현상이 심란한 것이다. 계절을 착각해 봄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오니 말이다.
입동이 며칠 전이었다. 초겨울에 접어들 시점이지만 아직도 화창한 가을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기후위기 걱정만 접어둔다면 그야말로 눈부신 나날이다.
가을걷이는 지난달에 마무리됐다. 아무 쓸모도 없는 가을비가 수시로 내리는 바람에 애를 먹었고, 생각보다 소출이 적었지만 별 탈이 없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며칠 전에는 첫 방아를 찧었다. 고산권벼농사두레는 올해도 어김없이 ‘햅쌉밥잔치’를 벌였다. 지난 주말이었다.
지난해까지는 집안에 밥상을 차려왔다. 회원들끼리 가을걷이를 자축하며 스스로 지은 쌀로 햅쌀밥 한 끼를 나누는 조촐한 자리였다. 날씨가 쌀쌀해 바깥이 부담스럽고 그러다 보니 수십 명이 복작거려 옹색한 점이 없지 않았다. 이 점을 감안해선지 올해는 고산 미소시장에 자리를 폈다. 마침 날씨도 화창해 나들이를 나온 주민들도 함께 어울리는 흥겨운 잔치판이 됐다.
잔치는 ‘냄비밥 짓기 대회’로 막이 올랐다. 누가 맛있게 밥을 짓는지 겨루는 행사. 8개 팀이 참여해 나름의 ‘기술’을 발휘했다. 같은 쌀로 지었으니 되고, 무른 식감만 다를 뿐 밥맛은 다르지 않을 텐데도, 심사위원들은 밥 한술로 우열을 가리느라 고심했다. 어쨌거나 스티커 별점 수에 따라 순위는 결정됐다.
그렇게 지은 밥으로 시장에 모인 사람들이 함께 점심을 나눴다. 햅쌀밥이야 반찬 없이도 그 자체로 꿀맛이니 준비팀은 무생채와 어묵국 정도만 준비했다고 한다. 장 보러 나왔다가 어떨결에 밥 한끼를 나눈 이들이 햅쌀밥 맛에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어 ‘천하장사 선발대회’가 펼쳐졌다. 쌀자루를 어깨에 매고 ‘스쿼드’ 운동을 시작해 끝까지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경기. 남성부와 여성부로 나눠 모두 여남은 명이 참여했고 각각 두어 명이 살아남았다.
‘벼두레 퀴즈쇼’가 이어졌다. 벼농사와 쌀을 주제로 하는 ‘OX퀴즈’. 스무 명 남짓한 사람이 참여해 한 문제마다 희비가 엇갈리고, 패자부활전을 거쳐 최종승자가 결정됐다.
그렇게 가려진 승자들에게는 벼두레 회원들이 운영하는 ‘삼산도가’에서 벼두레 쌀로 빚은 막걸리 센트와 쌀 한 자루씩을 상품으로 안겨줬다. 흥겨움이 넘쳐나고 흐뭇한 웃음이 피어나는 잔치판.
어쩌다 보니 탄수화물이 ‘공공의 적’이 되어 갈수록 쌀소비가 줄어드는 세상이 되었다. 여기에 역대 정권의 농업 무시 정책으로 쌀값마저 폭락세를 멈추지 않아 농민의 탄식은 깊어만 간다. 그에 따른 대응책이랍시고 당국은 벼 경작면적을 줄이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기후위기가 극한으로 치달아 세계적 식량위기라도 닥치면 어쩌려는지 아찔하기만 하다.
결실의 계절, 이 눈부신 가을날에 딱 어울리는 잔치가 끝나고 나면 늘 가슴 한 켠이 막막해지는 건 이 때문이다. 월간 <완두콩> 2024년 11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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