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14. 19:54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바야흐로 농한기다. 논과 밭, 한데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지친 심신을 가다듬고 쉬어가는 시간. 더러 이리저리 쏘다니며 ‘무한대의 자유’를 한껏 누리기도 했더랬다. 그 또한 덧없음을 느끼면서부터 농한기는 삶을 돌아보고 세상의 이치를 참구하는 관조의 시간이 되고 있다.
올겨울도 그랬다. 나락 거둬들여 방아찧고 여기저기 실어 보내고, 논 임대료와 기계삯 방아삯 따위 셈 치르고 나니 바쁜 일이 얼추 끝났다. 이제 평정의 시간으로 들어서려던 참이었는데 이 사달이 난 것이다. 비상계엄 선포와 실패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내란책동.
명색이 ‘대통령 담화’라는데 20세기 중후반에나 들을 수 있던 섬뜩한, 그러나 촌스럽기 그지없는 언어들. 이어진 ‘포고령’은 첫줄부터 민주주의와 공화정의 원리를 부정했다. 결국 절차와 내용 모두에서 헌법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조치임이 확인됐다. 국회가 곧바로 계엄해제를 결의한 건 당연하다. 아울러 이번 사태가 민주적 헌정질서를 깨뜨리려는 내란책동임을 뒷받침하는 사실이 잇따라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윤석열은 들끓는 ‘즉각 퇴진’ 여론을 외면한 채 여당에 공을 넘기고 말았다. ‘친위 쿠데타’를 저지른 ‘현행범’이 퇴진을 거부한다면 탄핵소추를 통해 직무를 정지시키고, 헌재의 결정에 따라 파면해야 마땅하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의힘은 당리당략에 눈이 멀어 1차 탄핵투표를 무산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윤석열 정권은 사실상 끝났다고 봐야 한다. 시민사회가 크게 반발하고 있고 항쟁의 물결이 거센 만큼 탄핵이 되었든 하야가 되었든 큰 흐름을 되돌릴 순 없을 것이다. 아울러 이번 사태 전개과정에서도 확인되었듯 우리 사회는 다시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어떤 사태반전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하루빨리 사태를 수습하고 정치를 정상으로 돌려놓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이게 됐다. 그렇다면 애초 자질이 없는 자가 결국 문제를 일으켰으니 선거를 통해 다시 새로운 인물을 세우면 사태가 해결되는 것일까. 문제가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차가운 겨울 거리, 촛불항쟁, 8년 만에 재현된 상황이다. 그 혹독한 대가를 치렀는데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뿐만이 아니다. 현행 직접선거에 의한 대통령제는 1987년 6월항쟁의 산물이다. 돌이켜보면 모두 8명을 대통령으로 뽑았지만 그 가운데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친 경우는 없었다. 설령 시작이 창대했어도 비극으로 끝난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이건 개인의 문제를 넘어 정치 시스템에서 비롯된 건 아닌지 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최고권력자 1인에게 집중된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라는 진단이 많다. 이번처럼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집권세력 안에서도 통제할 길이 없다는 점이다. 아울러 5년마다 벌어지는 대선은 권력을 둘러싼 전쟁터가 되고 만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정책을 대변하는 인물이 아니라 ‘OOO이 대통령 되는 걸 막기 위해’ 투표해오지 않았던가. 이런 상황에선 사회적 약자 권익보호, 생태보전, 성평등 같은 저마다 중요시하는 가치가 국가정책이나 의제로 반영될 길은 막혀버릴 수밖에 없다.
요컨대 40여년에 걸친 제6공화국 헌정체제가 이같은 한계를 드러냈다면 무턱대고 정치일정을 서두를 게 아니라 체제전환을 위한 지혜와 상상력을 폭넓게 불러모아야지 싶은 것이다. 정치에 관한 한 ‘이번 생애는 망했다’고 여기며 현실정치에 기대를 접어버린 어느 촌부가 느닷없이 농한기가 흐트러짐을 한탄하며 떠올린 ‘마지막’ 희망사항으로 읽어주기를. 월간 <완두콩> 2024년 12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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