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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두 번의 잔치
[낭만파 농부] 썰물 빠진 뒤의 적막 By 차남호 2021년 11월 24일 09:23 오전 주말 이틀 밤 내리 잔치를 벌였다. 서로 다른 두 번의 잔치. 잔치 첫날은 모두가 아는 사이지만 내가 속하지는 않은 무리, 그러니까 대학 1년 선배들 동문모임이다. 1980년대 초반 신군부 정권의 엄혹한 독재에 저항하던 이들이다. 민주주의의 기본이라 할 집회, 시위, 언론, 표현의 자유가 원천봉쇄 됐던 시대다. 정보기관원과 비밀경찰이 대학 캠퍼스에 상주하며 감시의 눈을 번뜩이던 시절이다. 투쟁방법으로는 기습시위가 유일했고 주동자는 감옥살이를 면할 수 없었다. 적극 가담자, 경우에 따라서는 단순 가담자라도 군대에 강제 징집되어 ‘녹화사업’에 시달릴 각오를 해야 했다. 그러니 활동은 살얼음판을 기듯 늘 가슴을 졸여야 ..
2021.11.24 -
1심 승소 그 다음
토요일 오전 11시에 집회가 열렸다. 비봉 돼지농장 앞 도로변에서 열렸다. 이름 하여 ‘행정소송 1심 승소! 비봉 돼지농장 부지매각 촉구 완주군민 결의대회’. 바쁜 추수철이다. 나락 수확은 얼마 전 끝났다지만 콩이며, 들깨며, 생강이며 거둬들여야 할 것들이 줄 서 있고, 말려놓은 고추를 갈무리 하고, 김장 준비도 해야 하는 눈코 뜰 새가 없는 철이다. 그래도 마을 어르신들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느릿느릿 집회장으로 모여들었다. 설령 농사를 짓지 않아 거둬들일 게 없는 이들에게도 토요일 오전은 움직이기가 쉽지 않은 시간이다. 그래도 어린 아이들 손 붙잡고 이 집, 저 집, 하나 둘 꾸역꾸역 모여드는 것이다. 다른 일이 잡혀 어렵겠다던 비봉면 사물놀이패가 뜻밖에도 집회 30분 전에 길놀이를 해주겠노라 연락이 ..
2021.11.08 -
2년 연속 흉작이었지만,돼지농장 소송은 승리해
[낭만파 농부] 씁쓸함-반가움 교차 By 차남호 2021년 10월 26일 10:36 오전 “햅쌀이 나왔습니다. 2년 연속 최악의 흉작이지만 그래도 좋은 쌀을 보내드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다만 현지 쌀값 급등에 따른 임대료 상승 등 인상요인이 누적돼 불가피하게 공급가를 현실화했습니다. 이 점 헤아려주시고 좋은 쌀로 갈음하시기를~ 무농약-무비료 우렁쌀! 생태가치 담긴 두레쌀! 게다가 밥맛 없으면 쌀값 돌려드려요^^” 올해 벼 수확량은 ‘역대급 흉작’이라던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이다. 예상했던 바이지만 막상 현실로 마주하고 나니 몹시 씁쓸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갈 길 가야지 했는데 가을장마로도 모자랐는지 무시로 가을비가 쏟아졌다. 나락이 젖으면 콤바인 작업을 할 수가 없는지라 여적 절반밖에 거둬들이지 못했..
2021.10.26 -
게다가 한꺼번에...
추래불사추(秋來不似秋). 가을은 왔으되 도무지 가을을 느끼기 어려운 나날이다. 코발트빛 새파란 하늘엔 뭉게구름 둥둥 떠가고, 들녘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넘실대야 하는 계절인데. 하늘빛이 어떤지 흥미를 잃은 지 오래고, 논배미 쪽으로는 눈조차 돌리기 싫어 애써 외면하고 있다. 가을장마가 남겨 놓은 생채기는 여적 아물지 않았다. 이태를 내리 ‘기후위기’라는 이름의 자연재해에 할퀴어 반타작 농사를 내다보노라니 기가 팍 꺾여버렸다. 꼭 해야 할 것만 겨우 갖추고 있을 뿐이다. 샘골지구 나락을 거둬들이려면 한 길 넘게 우거진 뚝방길 수풀을 예초기로 쳐내야 하는데 의욕이 나지 않아 하염없이 미루고 있는 중이다. 사정이 이러니 지난해에 이어 ‘황금들녘 풍년잔치’는 포기하기로 했다. 황금들녘도, 풍년도 현실이 아니니 어..
2021.10.07 -
저 논만 보면 애가 끓는다
[낭만파 농부] 갈 길 가야지 어쩌랴 By 차남호 2021년 09월 27일 09:09 오전 아직도 저 논만 보면 애가 끓는다. 하루가 다르게 누런빛으로 물들어 넘실대야 할 그 곳은 허여멀겋게 또는 칙칙한 잿빛으로 시든 벼이삭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삭이 팰 무렵 가을장마가 보름 넘게 이어지면서 심각한 병충해가 온 들녘을 휩쓴 것이다. 태풍 오마이스가 순하게 지나간 직후만 해도 “벼이삭은 거의 다 올라왔고 비바람의 피해도 없어 보인다, 다행이다”고 낯술판 벌이며 “술맛 떨어질 일은 없겠구나” 까불었던 이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싶다. 한두 가지를 빼고는 그야말로 작년 이 맘 때와 판박이. 지난해는 두 달 넘는 장마와 잇달아 덮친 태풍이 ‘백수현상’을 낳았다면, 올해는 장마에 따른 다습한 환경이 ‘목도열병’으..
2021.09.27 -
'우산속 가을비'는 없다
입이 방정이었나. ‘올해는 날씨가 도와준 덕에 농사가 순조로운 편’이라 입방아를 찧었더랬다. 그 다음부터 날이면 날마다 비가 쏟아지더니 햇빛 구경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날이 보름 넘게 이어졌다. 가을장마, 결국 사달이 나는 모양이다. 논배미에는 허옇게 말라비틀어진 벼이삭이 여기저기 고개를 떨구고 있다. 두 달 넘는 장마 끝에 초유의 흉작을 낳은 지난해 ‘백수현상’의 데자뷔. 그 때는 잇단 태풍으로 벼이삭이 말라 죽더니 이번엔 가을장마가 들이닥쳤다. 올해는 태풍 ‘오마이스’ 딱 하나 생겼고 그나마 순하게 지난 편이라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 그 뒤로도 비가 그치지 않는 것이다. 다습한 환경이 되면 병충해가 생기게 마련이고 걷잡을 수 없이 번지게 돼 있다. 아직 정확한 진단명을 알 수는 없지만 ..
2021.09.07 -
태풍 오마이스 지나간 후
[낭만파 농부] 팬데믹의 어떤 낮술 By 차남호 2021년 08월 25일 12:50 오후 태풍 오마이스는 다행히도 수굿하게 지나갔다. 태풍이 지날 때면 지붕과 뒷산 수목들, 그리고 땅바닥에 퍼부어대는 요란한 빗소리에 잠이 깨서는 밤새 뒤척이게 마련인데 이번엔 이른 아침에 고이 눈을 떴다. 온라인에 접속해 ‘태풍경로’를 뒤져보니 동해 바다에서 온대 저기압으로 변질돼 소멸됐다는 뉴스가 뜬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제법 굵은 빗줄기가 내리치고 바람까지 불어 유리창에 줄줄이 흘러내린다. 이내 마음이 심란해진다. 지금은 벼이삭이 한창 고개를 올리고 가루받이를 하는 철, 출수기다. 벼는 ‘자가수정’을 하는 식물이고 날씨가 좋지 않아도 낱알 껍질 안에서 수분이 이루어진다지만 비바람이 거..
2021.08.26 -
돼지똥과 상생의 길
이즈음 들녘에는 검푸른 물결이 넘실댄다. 특히나 논배미는 내리쬐는 따가운 햇볕을 자양분으로 광합성에 온힘을 다하는 벼 포기들로 기운이 넘쳐난다. 모내기 뒤 한 달 남짓 ‘새끼치기’로 식구를 늘리면서 몸피를 키우는 영양생장에 매달렸다면 이제 이삭을 만들고 나락을 살찌우는 생식생장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이다. 농부는 ‘중간물떼기’로 이 과정을 독려하다. 이 때 불어나는 식구는 이삭을 맺지 못하는 ‘헛 새끼’로 양분만 축낼 뿐이니 물을 끊어 무효분얼을 가로막는 것이다. 나아가 이삭을 살찌우려면 영양분을 한껏 빨아들이도록 뿌리를 키워야 하는데 물을 빼 산소가 땅 속에 잘 스며들도록 하려는 공작이기도 하다. 올해는 날씨가 도와준 덕에 이 작업이 순조로운 편이다. 장마가 두 달이나 이어지면서 물을 떼지 못해 생육도 ..
2021.08.06 -
양력 백중놀이의 즐거움그리고 돼지분뇨와 전쟁
[낭만파 농부] 코로나와 시골살이 By 차남호 2021년 07월 28일 10:20 오전 오늘 아침, 읍내 병원에서 코로나19 백신(모더나) 1차 접종을 받았다. 언론 보도와 주변 사람들의 경험담 속에서 은근히 후유증이 걱정됐더랬다. 한동안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무거우며, 피로감이 느껴졌지만 그리 심한 편은 아니다. 좀 심했던 숙취 탓인지도 모르겠다. 전국의 확진자 수가 갑자기 네 자리로 늘어나더니 20일 넘게 4차 대유행 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답답한 노릇이다. 백신 접종을 시작한 지가 언제인데 끝마친 인구가 여적 15%에도 못 미치고, 1차 접종자도 전체인구의 1/3에 지나지 않는다. 상황이 좀 나아진다 싶으면 방역을 늦추는 섯부른 조치가 반복된 탓이 크지 싶다. 방역조치는 바싹 조이면서 그에 따른 ..
2021.07.29 -
백중놀이와 돼지똥 냄새
연둣빛 여린 줄기 몇 가닥이 물결 따라 흐느적이던 논배미는 이제 검푸른 빛이 도는 무성한 벼 포기로 넘실댄다. 지금은 일주일 남짓 거센 빗줄기를 퍼붓던 장마도 걷히고 폭염주의보가 끊이지 않는 무더위의 시간. 모를 낸 지 한 달이 가까워 온다. 벼농사는 아직까지 순조로운 편이다. 그 새 적당히 비가 내려준 덕에 물 때문에 애태우는 일은 없었다. 두 달 씩이나 장마가 지속되는 통에 역대급 흉작을 기록했던 지난해를 떠올리며 걱정이 컸으나 올해 장마철은 그나마 순하게 지나갔다. 물 사정이 나쁘지 않아 왕우렁이들이 제구실을 다한 덕분에 잡초가 거의 올라오지 않았다. 여느 해 같으면 한창 김매기에 바쁠 때인데 아침나절 논배미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으로 그만이다. 이렇듯 김매기철이 싱겁게 지나가고 있지만 그래도 놀 ..
2021.07.13 -
온종일 뙤약볕 아래,연중 가장 바쁜 모내기철
[낭만파 농부] 난리 치른 듯 어수선 By 차남호 2021년 06월 29일 09:12 오전 마침내 한 달 가까운 모내기철이 끝났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는 연중 가장 바쁜 시절. 꼭두새벽 일어나 뙤약볕 아래 온종일 종종거리는 농가의 풍경이 그대로 펼쳐지는 때. 모내기는 논바닥에 모를 꽂아 심는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오랜 준비가 필요한 공정이다. 못자리의 모가 쑥쑥 자라 옮겨 심을 때가 다가오면 논배미를 만들어야 한다. 논배미 만들기는 모내기 준비과정을 말하는데 논두렁을 손보는 일에서 시작된다. 허물어지거나 낮아진 논둑을 손보는 작업으로 요즘은 ‘논둑조성기’라는 기계의 힘을 빌리는 게 보통이다. 트랙터에 매단 기계가 논둑을 지나가면 매끈하고 가지런하게 보강된다. 논둑 상태에 따라 2~3년에 한 번 이..
2021.06.29 -
웃픈 '대농' 신세
모내기 첫날, 이앙기 전조등을 밝혀 야간작업을 강행한 끝에 파김치가 되어 돌아왔다. 뙤약볕도 뙤약볕이지만 기계 상태가 시원치 않아 속도가 나지 않은 탓이 컸다고 한다. 내가 손수 이앙기를 몰지 않았으니 기계 운전자의 얘기를 옮기는 것이다. 이앙기를 몰지 않았다면? 그렇다, 운전자에게 모판을 대주거나 이런저런 잔심부름이 내가 맡은 임부였다. 아니, 전업 농사꾼이라면 농기계를 다루는 게 기본 아닌가? 사실 나는 천하의 기계치로 소문나 있다. 트럭 하나 제대로 몰지를 못해 걸핏하면 길섶에, 뚝방길에 바퀴를 빠뜨리기 일쑤라 농번기엔 하루가 멀다 하고 보험사 긴급출동을 부르기 바쁘다. 몇 해 전에는 이앙기를 몰다가 기계와 함께 옆으로 풀썩 넘어지는 사고를 낸 뒤로는 농기계를 운전할 엄두를 내지 않고 있다. 또 어..
2021.06.17 -
낯선 물못자리 공동작업
[낭만파 농부] 즐거우면서도 씁쓸함 By 차남호 2021년 05월 25일 10:28 오전 벼농사 철로 접어든 지 이제 달포가 다 되어간다. 볍씨를 담가 촉을 틔우고 모판에 넣어 못자리에 앉히는 작업이 끝났고, 지금은 못자리에서 볏모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지난 스무날 동안 날마다 물을 대주고, 무슨 탈이 나지 않았는지 살피면서 정성껏 돌봐오던 터다. 다행히도 하늘이 도와 가물지 않고 알맞게 비를 뿌려주어 애를 먹지는 않았다. 내일 저녁엔 그 동안 보온을 위해 덮어두었던 부직포를 걷어낼 참이다. 모가 웃자라는 걸 막고, 모내기 때까지 상온에 적응시키기 위함이다. 하얀 장막을 걷어내고 나면 천연잔디구장 뺨치게 아름다운 열세 줄의 짙푸른 융단이 그 장관을 드러낼 것이다. 논배미 위에 펼쳐지는 ‘인공미’라고 ..
2021.05.25 -
[느림] '친구'가 대체 무엇인관데...
봄비가 내린다. 4월로 접어든 게 엊그제 같은데 올해는 거리의 벚꽃이 벌써 지고 말았다. 빗방울 맺힌 울안의 복사꽃, 배꽃, 명자꽃이 함초롬하다. 비가 내리는 봄날엔 벗들과 더불어 술잔을 기울여야 제격이건만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술잔이 아니고 찻잔이면 또 어떠리. 창문 너머 내리는 빗줄기에 눈길을 맞춘 채 조곤조곤 시절을 되작이는 벗과 함께라면. 참 한가한 소리 하고 있다고. 비가 내려도 보송보송한 비닐하우스에서, 지붕 널찍한 축사 안에서, 편의시설 잘 갖춰진 사무실에서 맑은 날과 진배없이 열심인 시대에 어인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 한다는 핀잔이 들리는 듯하다. 그러든 말든 나는 자연을 거스르는 대신 순응하고 합일했던 옛 사람들이 몹시 부럽다. 벗과의 사귐 또한 그 시절에는 계곡물 흐르듯 멋스럽지 않..
2021.05.11 -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
이번 5월초 또한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볏모 농사로 바삐 돌아갔다. 일을 모두 마치고 나서야 ‘계절의 여왕’이라는 이 5월의 풋풋한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쌀 전업농인 나로서는 이 즈음에야 비로소 농사철에 접어든다. 4월말 볍씨 담그기를 시작으로 촉이 튼 볍씨를 모판에 넣은 뒤 못자리를 꾸며 앉히는 작업이 이어진다. 그 열흘의 작업이 끝나고 나면 한 달 남짓 못자리를 관리하며 볏모를 길러내게 된다. 그렇게 자란 모는 모내기를 통해 여기저기 논배미로 옮겨지게 된다. 모농사 초반작업의 공정이나 방법은 이미 정해져 있고 이 꼭지에서도 몇 차례 짚은 바 있다. 더욱이 이번호 에서는 이를 기획으로 다루고 있는 지라 예서까지 거듭 들먹일 일은 아닌 듯하다. 대신 그 뒷얘기, 그 가운데서도 먹거리 얘기를 ..
2021.05.10 -
연둣빛 뒷산, 다시 농사철
[낭만파 농부] 벼농사두레의 도반들 By 차남호 2021년 04월 21일 09:32 오전 세상이 온통 연둣빛으로 물들고 있다. 지난 달포 어간, 먼 산자락은 점점이 박힌 파스텔 톤의 연분홍빛으로 넘실대던 터다. 이제 돋아난 새순이 잎으로 피어나면서 들녘의 색감도 바뀌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둔갑술이다. 날마다 오르는 뒷산의 풍광 또한 하루가 다르게 표변하고 있다. 낙엽이 지고부터 겨울을 나는 동안 산은 내내 칙칙한 빛이었다. 그 지루한 정경은 겨우내 바뀌지 않았다. 봄꽃들이 저마다 앞다퉈 피어오를 때까지. 연두 빛 속에 핀 철쭉 숲의 주인공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간다. 진달래와 산벚꽃은 이제 말끔히 자취를 감추었고 다채로운 빛깔의 철쭉 무리가 여기저기서 그 무르익은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하지만 ..
2021.04.22 -
낮술은 봄비를 타고
이틀 내리 비가 내리다가 아침나절에야 멎었다. 이제는 굳이 ‘봄비’라 명토 박지 않더라도 계절은 이미 봄 한가운데로 접어들었다. 울안 잔디마당을 둘러 피어난 개나리, 복사, 배, 명자... 꽃들이 한결 눈이 부시다. 벚나무는 간밤 내리친 빗발에 후두두둑 꽃잎 떨구어 바닥에 흩뿌려 놓았다. 마침 주말이라서, 동네사람들과 작당해 마신 낮술에 거나하게 취한 탓으로 이 아침 속이 무척 거북하다. 그러고 보니 지난 3주간은 토요일마다 비가 제법 내려주는 바람에 ‘파전에 막걸리’ 따위 비를 핑계 삼아 술추렴을 이어왔던 터다. 어제는 어쩌다가 ‘빙충이’ 꼴. 그러니까 장대비가 내리는 가운데도 빙충맞게 읍내 카페에 들렀다가 우연히 마주친 이들이 급조한 술자리 되시겠다. 딱히 키워드랄 것도 없고, 그저 짚이는 대로 세상..
2021.04.06 -
꽃타령 봄타령
삼월, 바야흐로 봄이다. 이제는 누가 뭐래도 돌이킬 수 없는 계절, 봄날이 온 것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함박눈이 펑펑 쏟아진다 하더라도 봄은 봄인 것이지. 울안 잔디밭 한 켠에 서 있는 매화가 마침내 꽃을 피웠다. 바로 어제 일이다. 아침나절까지만 해도 반쯤 벙글었더니 해거름이 가까워 활짝 열어젖혔다. 그나마 딱 한 송이. 다닥다닥 맺힌 꽃망울들은 한창 부풀어 올랐다. 머잖아 앞 다퉈 피어나겠지. 봄은 꽃이다. 꽃부터 피고 새순이 돋아나는 건 그 다음이다. 한 번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는 꽃들의 행진. 누구라도 어쩌지 못할 꽃 사태. 벙그러진 매화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나 보다. 앞 뒤 잴 것도 없이 꽃 맞을 준비에 들어갔다. 지난 가을, 서리를 맞히고서야 부랴부랴 줄기 채 갈무리해 둔 여러 가지 꽃씨를..
2021.03.08 -
마침내 봄은 올 것이다
[낭만파 농부] 복수초, 화암사, 매화 By 차남호 2021년 02월 25일 11:02 오전 역시 봄은 꽃이다. 산기슭에 점점이 자리를 잡고, 한참 피어오르고 있는 샛노란 복수초를 바라보니 과연 그렇다. 무엇인가 보인다 해서 봄이라 했다지 않는가. 초목이 고스러지고 헐벗어 칙칙한 들녘에 불현듯 나타나는 고운 빛의 그 무엇이 눈에 확 띌 것임은 자명한 일. 학술적으로야 그 어원이 ‘빛’, ‘볕’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그 또한 같은 맥락이니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화사한 복수초로 하여 비로소 새봄을 만난 셈이 되었다. 엊그제, 그러니까 지난 주말을 맞아 봄을 찾아 마음먹고 나선 화암사 나들이 길이었다. 산사로 통하는 골짜기 양지바른 길섶에서 노란 꽃무리를 만난 것이었다. 그날따라 초여름이라도 된 듯 ..
2021.02.25 -
어느 '독거노인'의 비애
“…코로나19 확산세를 감안해 벼농사두레 정례행사를 유보한다는 안타까운 말씀을 전합니다. 새해 초반에 열어오던 '벼두레 회원 엠티(연찬회)'도 현재의 여건에 비춰 시행이 어렵게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나아가 역시 신년초에 해마다 열어오던 역시 특별한 사태반전이 없는 한 진행이 어렵게 됐다는 점 알려드립니다. 아쉽지만 시절이 이리 어수선하니 어쩌겠습니까. 깊이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고산권 벼농사두레 단체톡방에 두 달 째 걸려 있는 ‘공지사항’ 주요내용이다. 그 사이 ‘특별한 사태반전’은 없었고, 되레 ‘5인 이상 집합금지 명령’이 떨어진 지 한 달이 넘어간다. 한때 1천명까지 치솟았던 하루 확진자수는 3~4백 명 수준으로 줄었지만 예방조치를 늦추면 상황이 나빠질 게 뻔하니 어쩔 수 없어 보인다. 손님..
2021.02.08 -
공존·공생의 '방울소리'
[낭만파 농부] 새털구름이 가득하다 By 차남호 2021년 01월 28일 09:05 오전 “딸랑 딸랑” 등산화에 매달린 방울 소리가 참 청아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 발길에 맞춰 가지런히 울리니 리듬감이 생기는 듯도 하고, 허공을 가르는 또렷한 소리파장 덕분에 잡생각이 달아나는 것도 같다. 이렇듯 방울 소리 들으며 뒷산 오솔길을 거닐어 온지 이제 달포가 되어간다. 난데없이 어인 방울이냐고? 누군가는 남명 조식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퇴계 이황과 더불어 조선조 영남유학의 양대산맥을 이룬 산림처사. 대쪽 같은 기개와 지독한 자기절제로 유명했던 남명은 늘 깨어있는 삶을 살고자 품에는 경의검(敬義劍)이라는 장도를, 옷고름에는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차고 다녔다 전해진다. 성성자는 걸을 때마다 ..
2021.01.28 -
10쇄 찍었다는데
새해 첫머리부터 큰 눈이 내렸다. 내려도 너무 내렸고, 몹시 매서운 한파까지 몰아쳐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었다. 수도관이 얼고, 보일러 배관과 화장실 변기가 막혔다고 여기저기 아우성이 끊이지 않는다. 이 고장의 경우 60년 만의 최저기온이라고 하니 그럴 만도 하지 싶다. 매서운 추위에 웬만해선 밖으로 나다닐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하릴없이 집안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또한 급격한 지구온난화로 북극지방이 따듯해진 데 따른 지구의 반작용이라고 한다. 앞으로도 여름은 더욱 더워지고 겨울은 더욱 추워지는 양극성기후가 이어질 거란 분석이다. 결국 인류의 끝없는 탐욕이 부른 자업자득인 셈이니 누굴 탓하겠는가. 게다가 3차 유행국면을 지나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까지 겹쳐 새해를 맞는 심정..
2021.01.11 -
첫눈 내린 뒷산을 오르며
[낭만파 농부] 그래도 '새해'는 온다 By 차남호 2020년 12월 30일 09:43 오전 드디어 첫눈이 내린다. 그새도 한두 차례 시답잖게 내리긴 했지만 이번엔 내리는 폼이 제법 쌓일 기세다. 하지만 다 부질없다. 첫눈이 오는 날 어디서 누군가를 만나기로 약속을 했던지 가뭇하기도 하거니와 설령 그런 약속이 있었다 한들 그 누군가가 나타날 것 같지도 않은 까닭이다. 이 수상한 시절에 말이다. 코로나19 3차 유행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가 2.5단계로 격상된 상황이다. 여기에 수도권에는 ‘5인 이상 집합금지명령’이 떨어져 있다. 비수도권인 이 고장은 ‘금지’ 대신 ‘권고’ 수준이지만 분위기로 보면 크게 다를 게 없지 싶다. 달포 전까지도 ‘청정구역’이던 곳이 이제는 확진자수가 0에서 30으로 치솟은 ..
2020.12.30 -
이 겨울, 울안에 갇히다
아침나절부터 찬비가 제법, 그러나 수굿하게 내리고 있다. 윗녘에서는 눈이 제법 내린 모양인데, 겨울비 내리는 풍경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어차피 발이 묶이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은세계’에 갇히는 편이 훨씬 운치 있게 마련이다. 겨울비가 아니라도 두문불출 해온지 열흘에 가깝다. 시원찮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탓인지 어금니를 거지 반 잃었다. 바쁜 일을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던 끝에 올 겨울은 넘기지 말자는 생각으로 인공치아를 심는 1차 시술을 받았다. 처치는 별 탈 없이 끝났는데 수술부위가 덧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게 중요해 조신하고 있는 처지. 무엇보다 꽤 오랜 동안 술을 멀리해야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알콜기운 때문에 염증이 생기면 재수술을 피할 수 없고 그 경우엔 상황을 장담..
2020.12.14 -
느긋할 수 없는 농한기
[낭만파 농부] 모두가 '고난의 행군' By 차남호 2020년 11월 26일 10:54 오전 그러고 보니 농한기다. 농한기 기다리는 낙으로 농사짓고, 농한기 없으면 무슨 재미로 농사짓나… 하는 그 농한기 말이다. 처음 겪는 대흉작에 기가 팍 꺾이고, 코가 쑥 빠져 스스로 ‘이 판국에 무슨 얼어 죽을 농한기냐!’ 싶었더랬다. 줄어든 수입을 벌충해야 목구멍에 풀칠을 할 것이고, 그러자면 뭐가 되었든 또 다른 밥벌이를 찾아 나서리라 다짐하던 터였다. 가을걷이 끝나고, 나락 말려 방아 찧고, 밀려드는 마수걸이 햅쌀 주문에 사나흘을 밀봉작업하고, 상자에 포장해 택배 보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보냈다. 그 뒤로는 쌀 주문도 띄엄띄엄 뜸해지고 비로소 한숨 돌리게 된다. 해질 무렵 그제야 울긋불긋 물든 앞산의 단풍이며..
2020.11.26 -
만나자, 그리고 나누자
먼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났다. 요즘은 전에 없이 일찍 눈이 떠지는 날이 많다. 그만큼 마음 쓸 일, 켕기는 일이 많다는 뜻이리라.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하루일정이 빡빡하다. 오후에 비봉 돼지농장에 대한 행정소송 재판부의 현장검증이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업체가 주민들의 거센 반대와 완주군의 ‘가축사육업 불허가’ 처분에도 농장을 다시 가동하겠다며 제기한 소송이 한창이다. 오늘 현장검증은 돼지를 사육해도 문제가 없는지 농장의 입지와 분뇨처리시설을 비롯한 돈사 전반을 재판부가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3년 전 실시된 현지 실측조사를 바탕으로 농장 재가동에 따른 환경영향평가(시뮬레이션) 촉탁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두 가지 절차가 마무리되면 1심 재판도 조만간 결말을 맺게 된다. 주민들로서는 법원의..
2020.11.10 -
역대급 흉작, 농부의 마음
[낭만파 농부] "쌀값은 실존이구나!" By 차남호 2020년 10월 29일 02:48 오후 ‘혹시나’ 하는 기대도 없었고 짐작했던 대로 역대급 흉작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은 칙칙한 빛으로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태초의 공허로 돌아가 텅 비어버린 땅, 거기서 쉼과 희망을 끄집어내던 심성은 메말라 버렸다. 그야말로 ‘슬픈 가을걷이’. 수확기(콤바인)를 기다리며 소출을 어림하는 마음 졸임은 아예 없었다. 일주일 남짓 이어진 추수기간은 마치 ‘애도주간’이나 되는 듯 착 가라 앉았다. 얼굴마다 흐뭇하게 묻어나던 웃음기도, 탁배기 몇 순배에 흥청이던 거나한 추임새도 싹 가셨다. 작업자는 묵묵히 기계를 몰 뿐이고, 농사꾼은 허허롭게 뜬구름만 바라볼 뿐. ‘반타작’이네, ‘폭망’이네 하는 지경을 면한 게 그나마 다..
2020.11.01 -
풍진세상, 위로가 필요해
불현 듯 생각나는 게 있어 뒤적여봤더니 바로 이 즈음이었던 게다. 고산권 벼농사두레가 꾸리는 어울림 한마당 말이다. 오늘 당장 준비를 시작하더라도 어차피 잔치를 벌이기는 글러버린 셈이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뭉그적거린 것도 아닌데 일이 그리 되고 말았다. 어차피 그럴 형편이 못 된다는 걸 뻔히 아는지라 그저 애만 태우던 일. 참 씁쓸하다. 가을걷이를 하기 전에 를 벌이는 까닭이 있다. 황금빛 물결이 뿜어내는 눈부신 색감과 풍요로운 느낌, 그것만으로도 풍년을 얘기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사실 풍년인지 아닌지는 수확을 해봐야 안다. 그 전에는 어쨌든 풍년이라 우기면 풍년이 되는 것이다. 해마다 풍년잔치에 붙이는 설명이다. 그러나 올해는 아무리 해도 도저히 그렇게 우길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백..
2020.10.12 -
장마와 태풍의 후과,가을타령 할 팔자 아닌 듯
[낭만파 농부] 심각한 백수(白穗) 피해 By 차남호 2020년 10월 02일 11:47 오전 가을을 타나 싶었다. 허전한 마음은 주체할 수 없는 고립감에 한없이 타들어가고, 특정할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 이따금 발병하곤 하던 그 계절병. 그런데 아닌 모양이다. ‘코로나 블루’,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오랜 언택트 상황에서 비롯된 우울감이나 무기력증. 사회적 거리두기와 감염 우려에 따른 대면회피가 고립감, 불안감, 상실감으로 이어진다는 진단이다. 듣고 보니 그럴 법하다. 아닌 게 아니라 20~30대 여성의 자살률이 늘고, 상담건수도 두 배 가까이 치솟았다는 소식이다. 사실 이 고장은 지금까지도 지역발생 확진자수 0을 기록하고 있는 ‘청정지대’다. 그럼에도 방역당국의 거리두기 방침과 그에..
2020.10.03 -
백수에 돼지에
제9호 태풍 마이삭이 지나가면서 하루아침에 더위가 싹 가셨다. 공기가 선선해지고 가을로 접어든 건 몹시 반가운 일이지만 치른 대가가 너무 크다. 바비-마이삭-하이선으로 이어진 세 차례 초강력태풍으로 제주와 남동 해안지역은 처참한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두 달 가까이 여기저기 물폭탄 떨어뜨린 장마는 또 얼마나 많은 수재민과 경제적 피해를 안겼던가. 그나마 이 고장은 장마와 태풍 모두 비켜가는 바람에 그 피해가 크지 않아 안도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사실은 이 고장에도 한 발 늦게 피해가 찾아왔다. 백수현상. 실직자가 늘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白穗, 비를 동반한 강한 바람이 분 뒤에 고온 건조한 강한 바람이 통과하면서 출수 직후의 벼 이삭이 하얗게 말라 죽는 현상이다. 오랜 장마로 수정이 부진했던 점도 한 몫..
2020.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