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에 말걸기(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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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어수선한 봄
어쩔 수 없는 봄이다. 얼음이 스르르 녹는다는 우수가 보름 전이었다. 그 즈음에 불명산 화암사 들머리에 복수초(얼음새꽃)가 하나 둘 샛노란 꽃송이를 피워올렸댔다. 그러더니 엊그제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칩에는 뜰앞의 매화가 첫 꽃망울을 떠뜨렸다. 그러니 이제 누가 뭐래도 봄인 게지. 봄은 이렇듯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법이다. 하여 농한기도 그럭저럭 막바지로 치닫는 셈이다. 한 때는 눈 앞에 펼쳐진 이 ‘무한의 자유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쏘다녔더랬다. 어느 해부턴가는 그것도 심드렁해지고 동안거에 든 수도승처럼 두문불출 스스로를 울안에 가둬두고 있다. 그렇게 세상을 관조하고, 삶의 근원을 찾아 궁구하는 시절. 그러다 불현듯 마주한 봄은 그야말로 생명의 약동, 목숨붙이들이 벌이는 향연이다. 사람들도..
2023.03.07 -
매화는 물 오르고
2월로 접어드니 날씨가 확 달라졌다. 아랫녘에서는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설마 하는 마음에 바깥뜰에 심은 매화를 살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꽃망울이 부풀어 있지 않은가. 개화 등고선은 조금씩 북상하게 돼 있으니 우리 동네도 머잖아 매화를 영접하게 되겠지. 꽃망울만큼이나 마음도 부풀어 오른다. 안 그래도 뒷산을 오르자면 두꺼운 방한복과 바지가 거추장스럽던 차다. 한 시간 남짓 산을 타다 보면 막바지에는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는데, 이제는 줄줄 흐를 정도가 되었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도 한결 부드럽다. 이 모두가 봄이 다가오는 조짐인게지. 그러나 지난겨울은 무척 추웠더랬다. 그냥 추위도 아니고, 강추위도 넘어 ‘극강한파’라는 용어가 입길에 오르내렸다. 알고 보면 이 또한 기후위기, 지..
2023.02.10 -
출범 10년 앞둔벼농사두레의 올해 포부
[낭만파 농부] 벼농사 외 활동 확장 By 차남호 2023년 02월 02일 04:36 오후 어느덧 새해도 달포가 지나갔다. 그런데 올해 1월은 좀 별쭝맞다 싶게 바삐 돌아간 듯하다. 해가 바뀌든가 말거나, 늦도록 이불 속에 뭉그적대는 아침처럼 한껏 느긋한 게 농부의 1월 아니던가. 게다가 날짜 감각 둔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나로서는 더더욱 그러한데 이번엔 달랐다. 물론 여느 해보다 설이 일렀던 점이 있다. 내내 무신경하다가 설을 맞고서야 해가 바뀌었음을 알아채는 게 농부의 습성이니. 그로부터 사부작거리기 시작해 대보름 어간에 이르러서야 몸을 부리는 생체리듬 말이다. 어인 ‘라떼’ 타령이냐 싶겠지만 나같이 벼농사를 전업으로 하거나 아직도 농한기가 살아있는 농부들에게는 엄연히 ‘실화’다. 암튼 2월 중순에..
2023.02.02 -
'목적' 없이 살아볼까
계묘년, 토끼해가 밝았다. 토끼띠인 나로서는 환갑이 되는 해인데 그런 탓인지 새해를 맞는 심경이 좀 복잡하다. 어쩌면 은근히 ‘환갑잔치’를 고대하는 부류도 있을지 모르겠다만 ‘환갑’이란 말에서 묻어나는 느낌은 어쩔 수 없이 후줄근하다. 하지만 요샛말로 ‘백세시대’라 치면 이제야 중년에 접어드는 셈이니 기죽을 까닭이 없지 싶기도 하다. 세상 분위기를 보면 나이를 들먹일 나이가 아닌 게 맞는 듯하다. 그렇다고 심신이 회춘하는 건 아니니 한 해를 구상하면서도 몸 부리는 일은 애써 꺼리게 된다. 올해는 그 새는 하지 않던 짓, 새 다이어리에 한 해 계획을 적어보았다. 앞으로 해야 할 일, 하고픈 일을 죽 늘어놓는 식이었다. 역시나 뜨겁게 무엇인가를 좇고 싶은 생각은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세상의 흐름에 맡..
2023.01.08 -
특별한 수업과 영화제
[낭만파 농부]시골살이의 어떤 풍경 By 차남호 2022년 12월 28일 10:06 오전 오늘은 집에서 1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동네 초등학교에 다녀왔다. 거기 6학년 아이들과 얼마 전 펴낸 졸저 (사우)을 두고 얘기를 나눴다. ‘작가와의 만남’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특별수업. 그동안 이 책을 끈으로 비슷한 자리에 몇 차례 불려 다녔는데, 나로서는 오늘 수업이 여러모로 흥미를 끌었다. 귀농할 무렵 초등학생이던 둘째 아이가 이 학교를 2년 다니고 졸업한 인연이 있다. 그 바람에 나는 나대로 얼떨결에 팔자에 없는 학부모회장 노릇을 하기도 했던 추억이 서린 곳이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 아이가 졸업하고 나서도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이 학교는 해마다 6월 초에 ‘단오맞이 한마당’이라는 잔치를 열어왔는데(지금은 ..
2022.12.28 -
엠티 @ 겨울바다
“요즘 세상, 이래저래 어지럽고 뒤숭숭해서 우리네 마음도 보통 심란하지가 않지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 벼농사두레 겨울 엠티(수련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주변 정황으로 보자면 엄두를 내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부터도 그랬습니다. 마음이 심란해 주저되기부터 하는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일단 떠나보자. 서천, 그림 같은, 탁 트인, 겨울바다... 초점을 풀어버리고 지그시 바라보노라면 응어리진 마음도 이내 풀어지겠지. 아니면 짐짓 훌훌 털어버리든가. 수평선 위에 환각처럼 뿌옇게 펼쳐지는 노을을 응시하며 가만히 스스로를 다독여도 보고. “힘든 한해, 고생 많았어. 새해는 마음 다잡고 잘 풀어보자고...” 그리하여 서른 명 남짓이 1박2일 바닷바람을 쐬고 돌아왔다. 겨울, 그것도 바쁜 연말에 길을 나서..
2022.12.14 -
다시 맞은 '농한기'의 단상
[낭만파 농부] '농부'의 삶 선택 이유 By 차남호 2022년 11월 28일 10:40 오전 “바스락” “바스락” 뒷산 오솔길에 쌓인 낙엽을 사뿐사뿐 밟으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경쾌하게 울리는 소리. 쌓인 지 얼마 안 되는 데다 바싹 마른 넓은잎인 까닭에 울림이 더 크다. 빗줄기에 아침이슬에 눅고 미생물들이 갉고 나면 시나브로 사라질 소리. 누런 솔가리가 두껍게 깔린 구간을 지나노라면 그 낙엽 밟는 소리는 이내 잦아든다. 알록달록 산자락을 수놓았던 단풍이 나풀나풀 떨어져 쌓인 융단은 그야말로 가을의 끝자락이겠다. 바스락거리는 가을의 끝자락 가을이 가고 나면 겨울이지만 나한테는 겨울보다 ‘농한기’가 더 입에 짝짝 달라붙는다. 늘 해온 얘기지만 농한기를 기다리는 맛에 농사를 짓는지도 모르겠다. 뒤집어 말하..
2022.12.03 -
어떤 '햅쌀밥'
늦가을. 황금 물결 일렁이던 들녘은 다시 텅 비어 태초의 흙빛으로 돌아갔다. 황금 물결은 탐스러운 결실로 탈바꿈해 곳간으로 너울너울 흘러들었다. 그리하여 넉넉한 시절이다. 지난 이태, 흉작의 안타까움에 싸늘하던 고산 고을 농부들의 낯빛도 발그레 피어나는 가을이다. ‘풍년가’는 언제나 흥에 겨운 법이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건조를 거친 나락, 방아를 찧었다. 벼농사두레 경작회원들이 거둬들인 나락을 모두 찧자니 그 양이 꽤 되어 이틀 걸려 도정을 마쳤다. 논배미 크기에 따라 소출은 제각각이지만 햅쌀 자루를 실어나르는 흐뭇함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것으로 한 해 벼농사는 모두 마무리되었다. 올해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황금들녘 풍년잔치’를 건너뛰었지만, 평년작을 웃도는 만큼 ‘풍작’은 분명한 현실이다. 곳간을 가..
2022.11.09 -
계란으로 바위를 깨다
몹시도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비봉 돼지농장 재가동을 둘러싼 행정소송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주민과 완주군이 승소한 것이다. 그야말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다윈이 이긴 셈이다. 광주고등법원 전주 행정1부(부장판사 백강진)는 지난 9월14일 열린 ‘가축사육업 불허가처분 취소 청구 소송’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업체 쪽의 항소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렸다. 비봉 돼지농장 재가동을 불허한 완주군의 행정조치가 정당하다고 본 1심 판결을 유지한 것이다. 재판부는 판결에서 “중대한 공익상 필요가 있다면, 법령에 명문 근거가 없더라도 어느 정도 재량판단하여 허가를 거부할 수 있다”고 전제한 뒤 완주군이 불허가를 내린 세 가지 처분사유 모두가 정당하다고 보았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육시..
2022.09.19 -
처서, 가을이 오려나'기후위기'를 잊지 않아야
[낭만파농부] 무더위가 꺾이는 시간 By 차남호 2022년 08월 24일 02:04 오후 처서날, 아침부터 온종일 비가 내렸다. 24절기 가운데 열네 번째, ‘더위가 그친다’는 뜻을 담고 있는 절기 처서. 흔히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고 하여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을 느끼게 되는 때. 그렇더라도 햇살은 아직 후끈 내리쬐어 작물의 광합성을 도와야 마땅하건만 비가 내리다니. 처서에 비가 오면 ‘십 리에 천 석을 감하여’ ‘독 안에 든 쌀이 줄어든다’고 했던가. 맑은 바람과 따사로운 ‘남국의 햇볕’을 받아 기운찬 가루받이로 ‘장벼를 패야’ 하거늘 처서비(處暑雨)라니 이 어인 노릇이란 말인가. 그래도 우리는 일주일 남짓 늦게 모를 냈으니 이삭 패는 시기도 그만큼 늦겠거니 한가닥 위안거리가 떠올..
2022.08.26 -
에어컨이 뭐길래
7월말~8월초.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예전의 기억으로는 여름휴가가 몰리는 기간. 여전히 바뀌지 않은 사실은 연중 가장 더운 시기라는 것. 실제로 그렇다. 수은주는 연일 섭씨 35도까지 치솟고 습도까지 높아 그야말로 푹푹 쪄대는 나날이다. 이 찜통더위는 밤까지 이어져 잠을 제대로 못 이루는 ‘열대야’가 일상이 되고 있다. 하긴 지난 7월초에 이미 겪었던 현상이고, 미리 예행연습을 해 둔 효과라고 해야 할까? 버겁기는 해도 그럭저럭 견뎌내고 있다. 에어컨 없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올해로 7년째 ‘에어컨 없는 한여름’을 나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집, 경량목구조에 단열에 신경을 써서 지었더랬다. 겨울철 난방에 쓰이는 에너지를 최대한 줄이고, 한여름 냉방에 드는 전력을 최소화하자 했었다. ‘견물생심’이..
2022.08.08 -
반가운 소식···장마 끝, 본격 무더위 시작
[낭만파 농부] 벼농사, 새로운 국면 By 차남호 2022년 07월 25일 01:14 오후 ‘양력백중놀이’를 다녀온 다음 날, ‘백만 년만에’ 기타 줄을 갈았다. 갈아야 할 시점이 지나도 한참 지났건만 농사철로 접어들면서 때를 놓쳤더랬다. 바쁘기도 했거니와 뜻하지 않게 일이 꼬이고 어수선해져 단 몇 십 분, 겨를을 내지 못한 탓이 컸다. 그 몇 달 동안은 당연히 기타 한 번 손에 잡을 한 자락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것이지. 벼농사는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숨가쁜 새끼치기로 식구를 늘리는 영양생장에서 이삭을 올리고 나락을 여물게 하는 생식생장으로. 농부는 이때 ‘중간물떼기’를 해서 힘을 보탠다. 아니 농부 스스로를 이롭게 한다고 해야 하겠다. ‘생식생장’ 국면으로 접어든 논배미 모를 내고 한..
2022.08.08 -
'마음'이 문제다?
세상을 살다 보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상황에 부닥칠 때가 더러 있다. 특히나 사람 관계에서 이런 일이 빚어지면 그 결과가 사뭇 참담해지기도 한다. 예컨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 했는데 상대가 이를 형편없이 폄훼하는 경우다. 심지어 최선의 노력 그 자체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싫어하기도 한다.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답답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당최 어쩌란 말인가. 이런 일은 사람 관계뿐 아니라 자연 관계, 가령 농사에서도 벌어진다. 물론 식물이란 게 판단능력이나 감정을 지닌 존재가 아니니 사람처럼 변덕을 부리거나 싫증을 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 안에 설정된 생장 프로그램에 따라 스스로를 밀고 가면서 종종 사람(농부)의 뒤통수를 치기도 한다. 생각지 못한 사달이 끊이지 않은 올해 벼농사...
2022.07.14 -
‘창고파티’가 벌어진 이유
[낭만파 농부] 사연 많았던 모내기 By 차남호 2022년 06월 27일 04:47 오후 간밤에는 잔치가 벌어졌다. 해마다 모내기를 끝내고 펼치는 ‘모내기 무사 완료 가든파티’. 이번엔 우리 집 잔디밭이 아닌 모모 씨네 창고 앞마당이었다. 스무 명 넘는 이가 때 이른 한여름 밤의 정취를 즐겼다. 그런데 왜 잔디마당이 아니고 하필 창고였느냐? ‘창고 파티’ 며칠 전 끝난 모내기, 아니나 다를까 숱한 곡절을 겪었다. 다른 일도 그렇지만 농사라는 게 한번 틀어지면 잇따라 애를 먹게 되는 모양이다. 모농사를 한 번 망치고 나니 그 뒤로도 뒷탈이 끊이지 않았다. 두 번째 앉힌 못자리는 두둑 표면이 고르지 않아 듬성듬성 이빨 빠진 모판이 많이 나와 모판 부족 사태를 겪지 않을까 가슴을 졸여야 했다. 다행히 이앙기 ..
2022.06.30 -
모내기철, 숨이 막힌다
장대비가 쏟아진다. 소나기. 잠시 그쳤다가는 이내 다시 퍼붓기를 거듭하고 있다. 빗줄기가 세차서 농작업을 하지는 못하지만 반갑기 그지없다. 아, 양파를 캔 뒤 햇볕에 널어 말리고 있는 농가한테는 야속하기 짝이 없는 비라는 점이 걸리긴 하다. 그래도 미안하지만 내 코가 석 자이니 ‘표정관리’ 하고 있을 겨를은 없다. 한 달 넘게 가뭄이 계속되던 터다. 온 들녘이 타 들어가 작물이 말라 비틀어지던 중이었다. 물이 없어 모내기를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곳도 있었다. 우리 벼농사두레 회원들의 논배미가 스무 마지기 넘게 모여 있는 샘골이 그랬다. 저수지 수문이 고장 나는 바람에 물이 빠져 나갔고, 가물 즈음에야 수리가 끝나 물을 충분히 가두지 못했다. 수문 관리자는 나름 물을 아끼겠다며 꽁꽁 잠가두고 열지를 않아..
2022.06.17 -
벼농사두레의 힘,고마움과 자랑스러움...
[낭만파 농부] 새벽 빗소리에 깨다 By 차남호 2022년 05월 27일 12:27 오후 새벽 1시 30분. 빗소리에 잠을 깼다. 아니, 밤사이 비가 내릴 거란 엊저녁 일기예보에 사로잡혀 있던 무의식이 흔들어 깨웠는지도. 어찌나 반갑던지 저도 모르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폰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이내 오밤중이건 말건 벼농사두레 단톡방에 “비온다!” 외마디 탄성과 함께 동영상을 올린다. 안 그래도 비를 애타게 기다리는 톡이 줄줄이 올라와 있던 참이다. “기우제를 지냅시다!” “비소식 떴는데…” “이번엔 제발 ‘뻥’이 아니길” “내일은 비님이 꼭 와주시기를” 이 얼마 만이던가. 느낌으로는 몇 달은 되었지 싶은데 기록을 뒤져보니 딱 한 달 만이다. 물이 한참 아쉬운 농사철에 한낮으로는 섭씨 30도를 넘나드는 이른..
2022.05.28 -
'멘붕'에 대처하는 농부의 자세
이런 날벼락이 또 있을까. 그야말로 ‘멘붕’ 상황. 볍씨 담가 모판에 파종하고 사나흘 숙성시킨 2천판을 못자리에 앉혔는데 싹이 올라오지 않았다. 하여 그 공정을 고스란히 되풀이하고 있는 중이다. 귀농하고 지난 10년 동안 ‘쌀 전업농’의 길을 걸었다. 줄곧 밥맛 좋기로 유명한 ‘신동진’ 품종을 지어왔다. 그러나 밥맛은 좋지만 병충해에 취약한 약점을 안고 있었다. 그 탓에 신동진 벼를 심은 농가는 지난 이태 잇따라 대흉작을 맞은 바 있다. 안 그래도 신동진 품종이 개발된 지 20년을 지나면서 기능이 퇴화하는 문제가 있었고, 육종기관에서도 몇 해 전부터 대체품종을 연구해오던 터다. 이에 따라 개발된 ‘참동진’ 품종이 주목을 받아왔다. 요컨대 신동진의 약점이던 내병성을 더욱 높이고 밥맛도 개선했다는 것. 이에..
2022.05.19 -
농한기, 그 마지막 '몸부림'
이젠 꼼짝없이 농사철이다. 볍씨를 파종할 때 쓰는 상토가 오늘 토착했으니 말이다. 더는 “아직도 농한기가 끝나지 않았네” 우길 수 없게 된 것이다. 아쉽지만 세월을 어찌 이길 수 있단 말인가. 대보름 지나 노란 복수초 피어나고, 우수 경칩 지나 매화가 피어날 때까지도 “밭농사는 시작됐지만 벼농사는 아직 멀었다”며 짐짓 여유를 부렸더랬다. 하여 지난 며칠, 농한기의 마지막 ‘몸부림’이라도 되는 듯 여기저기를 싸돌았다. 봄바람도 쐬고 꽃구경도 할 겸 해서다. 부러 남들 일하는 평일을 골라 길을 나섰더니 차도 막히지 않고 발길 닿는 곳마다 그렇게 호젓할 수가 없었다. 벚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차창을 스쳐가고, 저 아랫녘에서는 어느덧 꽃비로 흩날리며 아찔한 정경을 연출하는 것이었다. 사람들 발길이 뜸한 고즈넉한 ..
2022.04.15 -
사람이 그리웠던 게다
[낭만파 농부] 다시 봄기운 느끼며 By 차남호 2022년 03월 31일 10:17 오전 역시 봄이다. 물오른 신록과 빛깔 고운 꽃들로 하여 불현듯 눈에 띄는 봄이기도 하다만 이번에는 따뜻함 또는 포근함에서 비롯되었지 싶다. 사실 지난 겨울은 몹시 추웠더랬다. 날씨 탓에 난방비도 많이 들었지만 무엇보다 때 맞춰 펼쳐진 대선, 서로 물어뜯기 바쁜 진흙탕 개싸움에 넌덜머리가 나고 그래서 더 추웠는지도 모르겠다. 그 이전투구가 어서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선거판이 막을 내리고 나서 들녘을 굽어보니 거기에 벌써 봄이 와 있었다. 하지만 여느 해와 달리 꽃은 좀 볼품이 없어 보인다. 겨울이 길었던 탓인지 일주일 남짓 늦게 피어났고 송이도 많이 줄어든 느낌이다. 지금도 서리가 하얗게 내리는 걸 보면 꽃샘추위..
2022.04.14 -
어느 '정치 소수자'의 비애
출구조사 결과 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당선이 확실해보이네요. 민주당원과 문 후보 지지자들께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저는 비록 문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예외 없이 실패로 끝난 역대 정권과 달리 성공하는 ‘문재인 정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지금도 기억하는 이가 있을까마는 5년 전, ‘장미대선’을 마치고 고산권 동네톡방에 내가 올렸던 글이다. 촛불혁명의 성난 물결 속에 전 대통령이 헌정사상 초유의 탄핵으로 물러난 뒤 끝이었다. 당시 집권당이던 새누리당은 궤멸위기를 맞았고 “향후 20년 동안은 보수세력이 집권을 꿈꾸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20년은커녕 10년도 아니고 5년 만에 치러진 이번 대선에서 저들은 보란 듯이 되살아나 정권을 탈환했다. 역사적으로는 ‘정..
2022.03.15 -
술은 죄가 없다!
설을 쇠고 나서 세월이 어찌 흐르는지 잊고 있었는데 방금 전 벼농사두레 톡방에 눈에 번쩍 뜨이는 멘션이 하나 올라왔다. ‘내일 모레 대보름에 즈음하여 고산에서 이명주-귀밝이술 한잔 하실 분 선착순 모집!’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저요! 저요!” 이모티콘을 올려놓고 생각해보니 어느새 정웓대보름인가 싶고, 빠르게 이어지는 연상 작용에 심사가 울적해진다. 이제 슬슬 몸을 풀면서 농사지을 준비에 나설 때가 되었다는 얘기고, 그러자면 대보름잔치 달집 활활 태우며 겨우내 웅크렸던 가슴을 활짝 피워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올해도 그 잔치를 건너뛰어야만 하는 현실이 안타까운 것이다. 코로나19 사태가 3년째로 접어든 탓이다. 한편으론 그것이 팬데믹 종식으로 가는 징후라는 진단도 있지만 오미크론 변이로 하여..
2022.02.16 -
눈을 뜨니 새벽 두 시
[낭만파 농부] 혼술을 그만둔 내력 By 차남호 2022년 01월 25일 09:53 오전 눈을 뜨니 새벽 두 시. 창밖으로 앞산 자락이 희뿌윰하게 비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칠흑 속에 묻혔다. 잠은 싹 달아나 버렸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대고립의 시간이 펼쳐지겠지. 달밤에 체조할 일도 아니고 환장할 노릇이다. 요즘 밤 시간이 거의 이 모양이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어서도, 번뇌에 짓눌려서도 아니다. 이를 불면증으로 보아야 할지 아닌지도 좀 헷갈린다. 분명한 사실은 이게 술에서 비롯된 현상이라는 점이다. 술에 취한 탓이 아니라 술 마시기를 그친 데 따른 ‘부작용’이라는 얘기다. 창문에 어른대는 새벽 풍경 ‘혼술’을 그만둔 지 이제 두 달이 되어 간다. 저녁을 먹고 나면 으레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홀짝이던 버..
2022.01.27 -
새해가 뭐 이래?
해가 바뀐 지 열흘 남짓 지났다. 늘 하는 얘기지만 농사꾼에게 양력으로 치는 새해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이 즈음은 자연계로 봐서도 ‘새롭다’ 할 무엇을 찾기 어려운 때고 세상사 또한 마찬가지다. 기껏해야 달력이나 다이어리가 바뀌는 정도로 새해를 느낄 뿐인 것이지. 음력으로 쇠는 설은 되어야 진짜배기 새해를 맞게 된다.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하며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올해는 뜻하는 일 꼭 이루시라 따위 덕담을 건네받으며 비로소 해가 바뀌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농사꾼으로서도 그날부터 대보름 어간에 날이 풀리면서 차츰 몸을 풀고 새 농사를 가늠해보는 것이다. 실제로도 바뀐 건 아무것도 없다. 지난해 마지막 날 강원도에 사는 벗이 먼 길 마다 않고 찾아왔더랬다. 오랜만의 만남이라 쌓인 얘기를 풀어내느라 늦..
2022.01.14 -
낙엽 쌓인 뒷산 오솔길
[낭만파 농부] 겨울은 더 깊어가고 By 차남호 2021년 12월 23일 01:34 오후 뒷산을 타고 왔다. 그러니까 나흘 만인가, 닷새 만인가? 별일 없으면 날마다 하던 짓인데 코로나19 백신 3차 접종으로 그새 쉬었더랬다. 접종 뒤 며칠 동안은 무리하거나 심한 운동을 삼가라는 지침 때문이다. 앓고 있는 ‘기저질환’이 도질 기미를 보이면서 지난해 가을 무렵부터 ‘유산소운동’ 차원에서 집 뒷산을 꾸준히 오르던 터다. 마을을 ‘좌청룡-우백호’로 두른 산자락 능선을 따라 30분 남짓 돌아오는 코스다. 야트막하지만 높낮이가 뚜렷해 땀이 송골송골 맺힐 만큼 에너지 소모가 큰 편이라 운동 효과가 없지 않았다. 땀으로 목욕을 하는 바쁜 농사철이야 달리 운동이 필요 없으니 건너뛰고. 초겨울이라선지 오솔길에 쌓인 낙엽..
2021.12.27 -
어느 '독거노인'의 김장독립
올해는 어찌하다 보니 혼자서 김장을 해치웠다. 가히 ‘독거노인 김장독립’이라 할만하다. 처음부터 그러려던 건 아니다. 김장이라는 것이 워낙에 한해 먹거리를 장만하는 거라 무척 큰일이고 품도 많이 드는 법이다. 해서 저마다 여건이 되는 대로 이웃끼리 품앗이를 하거나 식구들이 모여 해치우는 게 보통이다. 우리도 그새는 오누이 네 식구가 어머니 댁에서 함께 김장을 해오던 터였다. 물론 무 배추는 어머니가 텃밭에서 손수 기른 것이다. 늦여름부터 모종 사다가 심고 때맞춰 거름 주고 물주며 정성을 쏟은 놈들이다. 양념을 장만하는 일 또한 모두 어머니 몫이다. 고춧가루와 마늘, 생강, 쪽파 같은 풋것부터 소금, 젓갈, 액젓 같은 가공품까지. ‘애들’은 그저 어머니의 지휘에 따라 어마어마한 양념을 뒤섞고, 절인배추 나..
2021.12.10 -
서로 다른 두 번의 잔치
[낭만파 농부] 썰물 빠진 뒤의 적막 By 차남호 2021년 11월 24일 09:23 오전 주말 이틀 밤 내리 잔치를 벌였다. 서로 다른 두 번의 잔치. 잔치 첫날은 모두가 아는 사이지만 내가 속하지는 않은 무리, 그러니까 대학 1년 선배들 동문모임이다. 1980년대 초반 신군부 정권의 엄혹한 독재에 저항하던 이들이다. 민주주의의 기본이라 할 집회, 시위, 언론, 표현의 자유가 원천봉쇄 됐던 시대다. 정보기관원과 비밀경찰이 대학 캠퍼스에 상주하며 감시의 눈을 번뜩이던 시절이다. 투쟁방법으로는 기습시위가 유일했고 주동자는 감옥살이를 면할 수 없었다. 적극 가담자, 경우에 따라서는 단순 가담자라도 군대에 강제 징집되어 ‘녹화사업’에 시달릴 각오를 해야 했다. 그러니 활동은 살얼음판을 기듯 늘 가슴을 졸여야 ..
2021.11.24 -
1심 승소 그 다음
토요일 오전 11시에 집회가 열렸다. 비봉 돼지농장 앞 도로변에서 열렸다. 이름 하여 ‘행정소송 1심 승소! 비봉 돼지농장 부지매각 촉구 완주군민 결의대회’. 바쁜 추수철이다. 나락 수확은 얼마 전 끝났다지만 콩이며, 들깨며, 생강이며 거둬들여야 할 것들이 줄 서 있고, 말려놓은 고추를 갈무리 하고, 김장 준비도 해야 하는 눈코 뜰 새가 없는 철이다. 그래도 마을 어르신들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느릿느릿 집회장으로 모여들었다. 설령 농사를 짓지 않아 거둬들일 게 없는 이들에게도 토요일 오전은 움직이기가 쉽지 않은 시간이다. 그래도 어린 아이들 손 붙잡고 이 집, 저 집, 하나 둘 꾸역꾸역 모여드는 것이다. 다른 일이 잡혀 어렵겠다던 비봉면 사물놀이패가 뜻밖에도 집회 30분 전에 길놀이를 해주겠노라 연락이 ..
2021.11.08 -
2년 연속 흉작이었지만,돼지농장 소송은 승리해
[낭만파 농부] 씁쓸함-반가움 교차 By 차남호 2021년 10월 26일 10:36 오전 “햅쌀이 나왔습니다. 2년 연속 최악의 흉작이지만 그래도 좋은 쌀을 보내드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다만 현지 쌀값 급등에 따른 임대료 상승 등 인상요인이 누적돼 불가피하게 공급가를 현실화했습니다. 이 점 헤아려주시고 좋은 쌀로 갈음하시기를~ 무농약-무비료 우렁쌀! 생태가치 담긴 두레쌀! 게다가 밥맛 없으면 쌀값 돌려드려요^^” 올해 벼 수확량은 ‘역대급 흉작’이라던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이다. 예상했던 바이지만 막상 현실로 마주하고 나니 몹시 씁쓸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갈 길 가야지 했는데 가을장마로도 모자랐는지 무시로 가을비가 쏟아졌다. 나락이 젖으면 콤바인 작업을 할 수가 없는지라 여적 절반밖에 거둬들이지 못했..
2021.10.26 -
게다가 한꺼번에...
추래불사추(秋來不似秋). 가을은 왔으되 도무지 가을을 느끼기 어려운 나날이다. 코발트빛 새파란 하늘엔 뭉게구름 둥둥 떠가고, 들녘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넘실대야 하는 계절인데. 하늘빛이 어떤지 흥미를 잃은 지 오래고, 논배미 쪽으로는 눈조차 돌리기 싫어 애써 외면하고 있다. 가을장마가 남겨 놓은 생채기는 여적 아물지 않았다. 이태를 내리 ‘기후위기’라는 이름의 자연재해에 할퀴어 반타작 농사를 내다보노라니 기가 팍 꺾여버렸다. 꼭 해야 할 것만 겨우 갖추고 있을 뿐이다. 샘골지구 나락을 거둬들이려면 한 길 넘게 우거진 뚝방길 수풀을 예초기로 쳐내야 하는데 의욕이 나지 않아 하염없이 미루고 있는 중이다. 사정이 이러니 지난해에 이어 ‘황금들녘 풍년잔치’는 포기하기로 했다. 황금들녘도, 풍년도 현실이 아니니 어..
2021.10.07 -
저 논만 보면 애가 끓는다
[낭만파 농부] 갈 길 가야지 어쩌랴 By 차남호 2021년 09월 27일 09:09 오전 아직도 저 논만 보면 애가 끓는다. 하루가 다르게 누런빛으로 물들어 넘실대야 할 그 곳은 허여멀겋게 또는 칙칙한 잿빛으로 시든 벼이삭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삭이 팰 무렵 가을장마가 보름 넘게 이어지면서 심각한 병충해가 온 들녘을 휩쓴 것이다. 태풍 오마이스가 순하게 지나간 직후만 해도 “벼이삭은 거의 다 올라왔고 비바람의 피해도 없어 보인다, 다행이다”고 낯술판 벌이며 “술맛 떨어질 일은 없겠구나” 까불었던 이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싶다. 한두 가지를 빼고는 그야말로 작년 이 맘 때와 판박이. 지난해는 두 달 넘는 장마와 잇달아 덮친 태풍이 ‘백수현상’을 낳았다면, 올해는 장마에 따른 다습한 환경이 ‘목도열병’으..
2021.09.27